내가 호러를 보는 이유
나는 호러 마니아다.
영화 드라마 취향을 규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취향의 갈래 중 두터운 한 가지가 호러다.
아이들을 재우고 다행히 나도 함께 잠이 안 든 밤이면,
방바닥에 늘어진 장난감과 잡동사니를 발로 밀어 치우며 소파에 드러누워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그림도 그리는데
최근 일 년 동안은 코로나 시대와 함께 넷플릭스에 빠 져지 냈다.
호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많이 봤고,
이 정도면 다 봤나.. 싶은데도 계속 새로운 게 나왔다.
그러다 '케빈 인 더 우즈'까지 보고 이젠 정말 다 봤다. 볼만큼 봤다.
좀 지겹다.. 하는 순간,
미국에선 AHS, 아호스로 불리는 이 드라마는
2011년부터 시즌을 시작해 시즌 10 제작 중인데
이렇게 오래된 드라마를 왜 이름 조차 들어보지 못했는지 의아하기까지 하다.
(어디 가서 호러 마니아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아호스는 머리가 깨지고 뇌수가 튀어나오고 창자가 튀어나오고
벽에 피 칠갑하는 등의 고어적인 표현이 아주 구체적으로
자주, 오래 나온다.
호러를 잘 보는 나도 잔인하고 역겨운 장면이 너무 자주! 오래! 나와서
장면을 스킵하고 눈감고 보는 일도 잦다.
(무섭다기보다는 '고마해라 마이 바따' 하는 느낌?)
그런데 이상하게 발가락이 고부라질 것처럼 무섭지 않다.
왜냐면
제작자와 작가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호러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만든 장면이라고.
이거 알지?
기다려봐, 더 센 거 나와
어때? 괜찮았어?
이렇게 말을 걸면서 이건 오락이야, 하고 정확하게 선을 그어준다.
세계 종말까지 가는 마당에도 심각하고 진지해지진 않는다.
그들만의 세계를 설정해두고, 현실적인 공포와는 정확하게 선을 긋는다.
그래서 아호스는 호러 마니아에게
오락적으로 즐겁게 볼 수 있는 정말 괜찮은 시리즈다.
게다가 시즌마다
귀신의 집, 마녀, 컬트, 종말, 실화 범죄, 초자연, 슬래셔 등
호러 장르를 돌아가면서 보여주니 호러 마니아에게는 아호스 자체가
호러 종합 선물세트이지 않을까 싶다.
아호스, 호러 마니아라면 꼭 봐야 할 세 가지 이유를 꼽아본다.
나를 처음 이 기괴한 드라마에 빠지게 한 이유다.
제시카 랭이라니, 1976년작 영화 킹콩의 주인공 그 제시카 랭!
한때 호러 장르는 B급에 치부되었는데
아호스가 그저 호러 드라마가 아닌, 드라마에 품격을 부여한 장본인이다.
아마도 시즌 1을 볼 때 제시카 랭이 아니었다면 전 시즌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제시카 랭의 말투, 표정, 몸짓.. 그녀의 연기를 보는 것 자체에 감사함이 들다니..
제시카 랭 이외에도 캐시 베이츠, 사라 폴슨이 첫 등장할 때마다
아니 이분이 왜 여기서! 아 이분이 호러물에도 나오네!
놀라면서 봤던 기억이 난다.
아호스의 특징은 매 시즌이 완결된다는 것, 시즌마다 등장하는 출연자들이
다음 시즌 다른 배역으로 다시 출연한다는 것이다.
배우 사라 폴슨은 거의 모든 시즌에 나오고 에반 피터스, 엠라 로버츠, 릴리 레이브, 레슬리 그로스만 등
꽤 많은 배우들이 시즌마다 다른 캐릭터로 분해 다시 나온다.
시즌마다 전혀 다른 캐릭터로 분하는 배우들을 보는 재미가 좋다.
이전 시즌과는 완전히 다른 역할을 끝내주게 해내는 배우들을 보다 보면
연기력에도 감탄하지만, 그러다 보니
시즌이 뒤로 갈수록 무섭지 않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에반 피터스의 배역들이 인상적인 시즌이 많은데,
(에반 피터스는 엑스맨의 퀵실버이다!)
시즌 1 '저주받은 집'에서는 소년같이 해맑으면서도 잔인해서 불쌍하기도 한 이중적인 분위기를 풍기다가
시즌 7 '컬트'에서는 어처구니없이 미친 미친놈 교주로 분노를 자아낸다.
(복귀하자니 출연한 모든 시즌 맡은 역이 공통적으로 미친놈 이긴 하다)
시즌 전반적으로 여성 캐릭터가 키를 잡고 가는 경향이 강한데
시즌 3 '마녀 집회'에서 제시카 랭과 케시 베이츠 합을 보는 쾌감은 정말 짜릿하다.
시즌 8 '종말'에서 첫 등장했지만 궁극의 악마인 마이클 랭던 역할을 한 코디 펀은
넷플릭스에 최근 공개된 시즌 9 1984를 보게 된 이유가 됐다.
제작자 라이언 머피가 드라마 베르사체를 막 끝낸 코디 펀을 만나
'우리가 엄청 강한 여성들(제시카 랭, 사라 폴슨 등)과 함께 일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하는데,
시즌 8은 코디 펀이라는 이 생소한 비밀 카드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아호스, 찝찝한 호러를 싫어하는 마니아에게 추천한다.
아호스는 끝이 안 날 것 같은 어둠 속으로, 종말의 끝으로 우리를 끌고 가 버리지만
결국엔 종국엔
빛을 보여준다.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다.
해석에 따라 아닐 수도 있고 해피엔딩인 척하는 시즌도 있지만
여하튼 종말은 종말이 아닌 게 되고,
연쇄살인마는 보기 좋게 처벌되고,
마녀들은 불 타 죽지만 다시 살아나고..
아호스의 세계는 끔찍하지만 개운하다.
김 빠지는 게 아니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스토리 전개 과정에서 우리는 어둠의 끝을 맛보기 때문에 결말에서라도 해피엔딩을,
해피엔딩인 척하는 엔딩을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시리즈를 계속 마주할 수가 없다.
사실 이 개운함은 제작자인 라이언 머피와 브래드 팰척 스타일이기도 한 것 같다.
(두 제작자는 미드 '글리'의 제작자 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특히 재미있게 본 시즌은 이렇다.
시즌 1 저주받은 집
시즌 3 마녀 집회
시즌 7 컬트
시즌 8 종말
시즌 9 1984는 좀 실망스러운 감은 있었으나 80년대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색다른 재미가 있는 시즌이다.
[평점]
잔인함 고어지수 ★★★
제시카 랭 멋짐지수 ★★★★
에반 피터스 귀여움 지수 ★★★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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