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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부자 Aug 19. 2022

고향집 방문

내 취향과 선택의 뿌리가 그곳에 있었다.

연휴에 남편과 아이들과 2박 3일 고향집에 다녀다.

내 고향집은 지리산 둘레길 2코스 부근,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시골 마을이다.

나는 병원이 아닌 고집에서 태어났고(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날 받으셨다), 7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 동네에는 나랑 같은 해에 태어난 여자아이 두 명이 더 있었고, 우리 셋 중 둘은 도시로 이사를 갔지만,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방학마다 시골에 모 방학 내내 같이 놀았다.

시골집은 내가 태어난 곳이자 유년시절의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니 비록 7살에 시골을 떠났어도 그곳은 개념적으로, 정서적으로 나의 고향집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에는 시골집에 오래 머무른 적이 없었다. 차로 4시간 거리라 아직 많이 어렸던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에는 좀 무리였다. 부모님이 계신 전주에는 해마다 며칠씩 묵었지만,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의 시골집은 오래 머무르기 좀 불편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손녀가 가면 뭐라도 해주고 싶어 하셨고, 뭐라도 나눠주고 싶어 하셨는데, 됐다고 해도 계속 뭘 주시려고 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고, 나이가 드시면서 본인이 직접 주시기에 여의치 않자 자식들(엄마와 아빠)에게 그런 요구를 하시면서 자주 다툼이 일어났다. 할머니는 "손녀딸 이거저거 챙겨줘라. 잊지 말고 챙겨줘라" 두번세번네번 잔소리를 했고(말투가 그리 상냥한 편이 아니셨), 엄마는 겉으로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나에게 "필요없고 짐만 될텐데 자꾸 저러신다"며 투덜댔고, 아빠는 대놓고 할머니한테 반항하다 서로 언성이 높아지곤 했다. 그리고 엄마 아빠 할머니 모두 나이가 들면서 귀가 어두워져서 그냥 대화도 싸움처럼 들리곤 했다. 그래서 작년에는 애들을 전주 친정집에 놔두고 나랑 남편만 할머니 얼굴 뵈러 잠깐 들르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작년 겨울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 시골집은 엄마아빠의 주말농장 숙소가 되었고, 이들도 이제 제법 커서 4시간의 장거리 여행도 가능하게  연휴에 간이풀장까지 챙겨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마을에 살고 계신 외할머니도 매일 찾아뵙고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었다. 우리 엄마아빠는 같은 동네 사람이어서 할머니집과 외할머니집이 한 동네에 있다. 작년 겨울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계실 때 더 자주 찾아뵙고 시시한 아무 이야기라도 나눌 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서 아직 정정하신 외할머니를 더 자주 뵈어야겠다음으로 연휴에 시골을 찾은 것이다.


오랜만에 삼일동안 머무른 고향집과 시골마을에는 내 취향저격인 것들이 가득했다.


- 마당이 있는 작은집

- 마당에서 구워먹는 고기

- 가리는 것 없이 탁 트인 논과 밭, 그 너머로 보이는 산

- 온몸을 휘감는 바람의 촉감

-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사르륵 소리

- 나무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는 숲


당연한 것이겠지만 내 취향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내 유년시절의 경험(고향마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건 그리 놀랍지 않았다.


내가 이번 시골 방문에서 새삼 자각하여 놀랐던 것은, 내가 삶의 중요 순간마다 선택해왔던 '내 삶의 방식'이 엄마와 외할머니의 방침에서 한치도 어긋나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외할머니는 7명의 자식을 낳으시고도 농사일과 방앗간일 등 생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셨고, 우리 엄마는 4명의 자식을 낳고도 식당일로 계를 책임졌으며, 두분 다 일하는 관성이 대단하여 아직도 일을 하는 게 더 편하고, 놀면 몸이 더 힘들다는 분들이다. 고로 외할머니와 엄마의 삶의 방침 내지 철학은 이렇다.


-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해야 한다.

- 결혼을 하면 모름지기 애를 낳아야 한다.

- 애가 하나면 외롭고, 낳기로 하였다면 둘은 되어야 좋다. 그러나 본인들의 경험상 애를 너무 많이 낳으면 힘들어서 좋지 않다.

- 애를 낳아 엄마가 되어도 바깥 일을 해야 한다.

- 일을 하느라 육아가사에 소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육아가사의 주책임자는 엄마다.

- 그치만 내 딸(손녀딸)이 나만큼 고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두 분의 위 방침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고, 서른살에 결혼하여, 서른두살에 큰 아이를 낳고, 서른네살에 둘째 아이를 낳고, 출산 전후로 직장생활을 쭉 해오고 있으며, 가사와 육아의 주책임자 역할을 맡고 있다. 다행히 전문직이라 머리를 쓰는 일을 하여 몸이 많이 고되지는 않고, 일주일에 한번 청소도우미가 방문하,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는 등 두분보다는 덜 고생하고 있다. 두분보다 덜 고생한다는 점까지 완벽히 고향의 방침을 따르는 삶이다.


나는 자유를 삶의 제1원칙으로 여기는 사람이고, 스무살 즈음부터는 매순간순간을 내 자유의지로 선택해왔다고 자부했고, 타인의 평가나 개입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편이다. 제법 독립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해왔는데, 지난 삶의 주요 구비구비마다 내게 새겨진 고향의 방침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선택을 해왔다는 것은 새삼 충격이었다. 나는 늘 내가 전업주부 적성이 아니고, 일을 해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스로에 대한 평가마저 주입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 들었다.


그래서 요즘 갑자기 슬퍼질 때가 많았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이 지금 이 생활이 맞는지 불쑥불쑥 의문이 들었나보다. 내가 자주 보며 아끼는 책들 - 심플하게 산다. 홀가분한 삶, 작은 생활, 집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 모든 삶은 작고 크다 등 -과 나의 지금 생활이 차이나는 이유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과 주입된 삶의 방향이 달라서일까.


근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은 '애들을 성인까지 키운 후 지방의 중소도시로 내려가 작은 집에 살면서 적게 벌고 적게 쓰며 간소하지만 충실한 순간순간을 보내는 것'인데, 이러한 삶의 지향점 역시 고향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다. 도시에서 나서 도시에서 자랐다면 이런 지향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나의 정서는 내 출발점인 고향 시골마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 정서의 뿌리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을 받아들이되, 앞으로는  내 욕구와 선택에 대해서 면밀히 들여다보며 "지금 내가 선택하려는 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따르게 된 보편을 가장한 방침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들여다보자. 이를 통해 내 지향점도 보다 명확해질 것이고, 삶의 방향도 지금까지 흘러왔던 것에서 조금씩 달라지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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