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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부자 Mar 12. 2023

시간에 쫓기고, 할 일에 끌려다닌다.

지난 2월 남편이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했고, 내가 재택으로 일하며 주양육자가 되었다.

첫째가 7살 때까지는 시댁에서 평일에 아이들을 전적으로 봐주셨고, 우리 부부는 주말에만 아이들을 데려왔다. 첫째가 8살이 된 2022년에는 남편이 1년간 육아휴직을 하고 주양육자 역할을 맡았다. 나는 출근 전, 퇴근 후, 주말에 육아를 담당했고, 남편에게 주책임자 역할을 맡기기 위해 일부러 학교 알리미 어플도 설치하지 않고 학원과의 소통에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2월 중순에 남편이 복직하면서 처음으로 주양육자 역할을 단독으로 맡게 된 것이다.


일단 초등학교의 겨울방학은 매우 길다. 1월 초순부터 3월 1일까지가 방학이다. 방학 중 가장 큰 문제는 삼시세끼를 집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식이나 매식을 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아이와의 끼니를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방학 동안은 하루가 참 길다. 그래서 각종 학원에서 방학특강을 연다. 첫째는 월금 오전에는 수영특강을 가고, 화목 오전에는 축구특강을 갔다. 그리고 학기 중에 매일 다녔던 영어학원을 그대로 매일 오후에 가고, 월수 오후에는 영어학원에 이어서 태권도 학원을 갔다. 태권도 학원을 제외하고는 학원차가 집앞으로 아이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준다. 아이가 학원차를 타고 학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1시간 반~2시간 동안 나는 집에서 업무를 하거나 집안일을 한다. 그리고 월수 오후에는 아이를 데리러 태권도 학원으로 간다. 처음에는 평일 낮에 집에 있으면서 아이를 배웅하고 짧은 산책 후 들어와 집에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태권도 학원을 마친 아이와 근처 분식집에서 어묵이나 떡볶이를 사먹는 소소한 여유를 누릴 때는 감격스럽기도 했다. 나름대로 요일마다 루틴이 있었고, 업무나 집안일을 좀 하다보면 금세 아이가 돌아와서 무언가를 자꾸 요구하니 마음이 좀 바빴지만, 겨울방학만 지나가면 한결 여유가 생길 것이라는 믿음으로 지낼 수 있었다. 힘든 일도 기한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지내기가 훨씬 수월한 법이니까.

    

그렇게 드디어 3월 2일이 되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개학을 했다. 그런데 전혀 더 여유로워지지 않았다. 더 정신이 없고, 매순간 마음이 조급하고 할 일에 쫓긴다. 아침마다 할 일 목록을 작성하는데, 매일 예정에 없던 일들이 추가되고, 그러면 또 마음이 조급해진다. 조급하게 무언가를 계속하는데도 다 조금씩 부족한 것 같다. 일도 평소보다 진행 속도가 느리거나 완성도가 떨어지나 싶고, 그러면서도 아이들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업무 관련 생각이나 의사소통을 할 때도 많아 육아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루 종일 종종거리다 보면 저녁 즈음에는 완전히 지쳐 내가 올해 목표로 삼았던 '잘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하자'는 다짐은 생각나지도 않는다.


개학을 했는데 왜 이렇게 바쁜가 싶어 3월 2일부터 오늘까지의 일과를 한 번 떠올려 보았다.  

6시 20분에 일어나서 일기를 쓰고 책을 읽는다.

7시 30분쯤 일어나는 첫째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씻는다.

8시 25분에 첫째를 학교에 보낸다. 이제 학교까지는 가지 않고, 집 현관까지만 배웅한다.

곧바로 둘째를 깨워 아이를 다그쳐 준비를 시키고 8시 50분에 둘째를 유치원에 등원시킨다. 치원은 차로 왕복 40분 거리여서 집에 돌아오면 9시 40분 정도 된다.


둘째를 등원시키고 집에 돌아온 후 10시부터 첫째가 하교하는 2시까지 사이에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일에 쫓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개학 이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계속해서 오전에 일정이 있었다. 개학 첫날인 목요일에는 동생네 집에서 점심 약속이 있었다(세자매 회동). 개학 둘째날인 금요일에는 회의가 있어서 회사에 출근했다(회의는 한 시간, 통근이 왕복 두 시간). 이번주 월요일은 첫째의 친구 엄마들과 점심을 먹었고, 화요일에는 테니스 첫 레슨을 받았고, 수요일에는 일에 좀 집중하려 했는데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집에 놀러왔고, 목요일에는 독서모임을 했고, 금요일에는 병원에 갔다.


이런 개인 일정이 있다 보니 아침부터 업무 걱정에 마음이 바쁘다. 래서 개인 일정 전후로 틈만 있으면 업무를 한다. 그렇게 쫓기듯이 일을 하다 보면 2시가 좀 넘어 첫째가 하교한다. 최근에 '아이를 좀 더 정성스럽게 키우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에 아이의 요청에 따라 같이 놀이터에 나가서 아이를 응대해준다. (동네 친구들이 학원 다니느라 놀이터에 다른 친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다 3시쯤 아이를 영어학원으로 배웅한다. 자전거 타는 아이와 중간까지 함께 간다. 방학에는 아이를 배웅한 후 공원을 짧게 산책하고 돌아와 일을 했는데, 요즘에는 그 짧은 산책도 할 여유가 없다. 막바로 집에 들어와서 또 쫓기듯이 일을 한다. 그러다 보면 4시 30분쯤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오고, 그 때부터는 웬만하면 일을 놓는다.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갈 때도 있고 집 거실에서 아이에게 말을 걸며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서면 업무는 놓았지만, 이런 저런 업무 연락이 오면 저녁 6시가 되기 전까지는 업무 소통에 임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와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대화가 중단되기 일쑤다. 그리고 식사준비를 하고 하원하는 둘째를 맞이하고 밥을 차려서 7시에 식사를 하고 나면 정말 너무 지친다. 이런 일정으로 하루를 보내다 보면, 그 날의 할 일 목록 중 미처 다 하지 못한 일이 있기도 한다. 그러면 빨리 그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밤새 잠을 설치다 새벽 5시에 눈이 떠져 새벽부터 일을 하기도 한다. 업무도, 육아도, 개인적인 활동도 모두 부족한 상태로 할 일에 끌려다니며 시간에 쫓기다 보니 글을 쓸 시간도 없었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 어제 독서모임에서 도미니크 로로의 책 '심플하게 산다'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불현듯 깨달았다. '돈이 많이 들지 않으면서도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자신만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서고를 둘러보고 도서관 주변 하천을 산책할 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든다고 말했더니, 다른 회원분이 "도서관에 혼자 가냐"라고 물었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도서관에 혼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같이 간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도서관 서고를 원하는 만큼 충분히 여유롭게 둘러볼 수 없다."였다. 나는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든 상대의 기다림을 줄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혼자서 말을 길게 해야 할 상황이 되면, 상대가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다고 지레짐작해 말이 길어질수록 속도가 빨라지고 당황스러움에 목소리가 떨렸다. 최근 맡게 된 업무들이 신속을 요하는 가압류 사건이었는데, 의뢰인이 오매불망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밤에 잠을 설친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를 돌보는 시간을 포기할 수 없으니 새벽 5시에 일을 시작해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일을 마쳤다. 육아가 힘들었던 것도 어쩌면 아이가 나를 부르고 기다릴 때 즉각 응답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정해야 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즉각 만족시킬 수는 없다. 누구도 나를 조금도 기다리지 않는 상황은 불가능하고, 올바르지도 않다. 정작 나는 다른 사람이나 차례를 기다리는 것에 그렇게 힘들거나 분노하지 않으면서, 왜 그렇게 타인을 즉각 만족시켜야(응답하여야) 한다는 강박에 짓눌렸을까. 나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은 순서와 차례가 있고, 내게는 우선순위를 정할 권한이 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일>

이제까지는 육아를 담당해줄 주책임자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 충분히 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일을 줄였지만, 일하는 시간도 줄였기 때문에 예전처럼 '필요시 야근불사'의 마음으로 일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해야 할 업무가 있으면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서 최대한 빨리 마치기로 했다. 업무 메일은 새벽에 발송하되, 9시 이후에 전송되도록 예약발송 기능을 이용하여 수신자가 당황하지 않도록 한다. 미리 계획된 업무는 서둘러 시작하여 빨리 마치되, 하루 내내 불시에 오는 업무연락에는 즉각 응답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지 말자. 하루 중 두어시간 핸드폰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는 않는다. 어차피 이전까지도 재판, 입회, 회의 중에는 즉각 응답하는 것이 어려웠었다. 아이와의 대화시간, 나를 위한 시간은 하루에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시간을 재판시간, 회의시간이라 생각하고 잠시라도 응대 강박을 내려놓는 시간을 갖자.


<살림과 육아>

사실 요리하고 청소하는 것이 무척 즐겁고, 더 잘하고 싶다. 육아에서는 아직도 고전하고 있지만, 우리 아이들의 성장에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고, 아이들을 좀 더 정성스럽게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학원도 많이 그만뒀고, 아이들에게 여유 시간을 좀 더 갖도록 하고 아이와 교감하는 시간을 좀 더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전업주부가 아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욕심을 내려놓는다. 평일 낮에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살림과 육아 중 더 순위가 높은 것은 육아다. 아이가 말할 때 집중해서 경청하고, 놀자고 청할 때 아주 조금이라도 같이 논다(친구 아닌 엄마에게 놀자고 할 시기가 얼마나 남았을지 모른다). 대신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 때는 양해를 구하고 일에 집중한다. 애매하게 아이와 대화하는 척, 놀아주는 척하면서 업무 생각을 하지는 말자. 그리고 조급한 마음으로 아이의 일을 대신해주지 말고, 자율성과 독립성을 키울 수 있도록 기다려주자.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제일 못하는 것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목표를 잊지 말자. 올해 나는 '잘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목표였다. 지금 하는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실마리를 찾고 싶다.


계속해서 생겨나는 각종 해야 할 일에 끌려다니거나 쫓기지 않고, 이러한 우선순위를 의식하며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결정하면서 내가 시간을 주도하고 싶다. 똑같은 일정으로 하루를 보내더라도, 내가 스스로 선택하여 결정한 것인지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인지에 따라 시간의 질이 확연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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