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소설과 조금 다른 요즘 소설
최근 한국 소설의 경향은 성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해서 개인적 서사에 치중하는 면이 많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논란의 여지를 떠나서 오토픽션이라는 장르가 확고히 자리 잡은 듯하고, 개인과 사회가 주고받는 영향보다는 개인의 내면의 문제를 좀 더 치밀하게 파고들어야 하는 시대인 것 같다. 90년대부터 이미 개인은 중요한 화두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다양한 주제로 충분히 들여다볼 시간이 더 많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젊은 작가가 사회적 문제를 다룬 소설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어졌다. 더구나 국가 간의 문제나 이념의 문제를 한국의 젊은 작가가 다룬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이 소설에 대한 놀라움이 컸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난민, 장애인, 약자,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 문제는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남북한 문제와 통일 독일의 문제를 연결해서 우리 문제를 세계적 관점으로 확장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찾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탈북민 또한 소수자이며 약자지만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소재는 아니다. 우리는 북한에 대한 관심보다는 당장 우리 사회의 문제와 우리가 좀 더 잘 먹고사는 문제에 훨씬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용기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해야만 하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런 순간이 있어야 보다 인간다운 면모를 갖출 수 있으며, 그런 면모를 갖추도록 도와주는 것이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설이 담고자 하는 담론이 무거워질수록 재미와 문학성이 흔들리기 쉽다. 어려운 주제를 쉽게 풀어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그런데 해주와 용준의 이야기로 풀어낸 이 소설은 그 어려운 일을 성취한 것 같다. 해주가 용준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는 과정도 재밌고, 윤송이의 죽음을 추적하러 독일의 작은 마을 베르크로 가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해주가 형사라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용준을 만날 수 있었고, 사건을 풀어내는 형태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서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용준이 보여주는 슬픔과 절망은 우리에게 국가가 개인에게 강제할 수 있는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고민하게 한다.
더불어 장춘자라는 인물을 통해서 남북한이나 독일과 같은 특정 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민자로서 겪는 문제까지 확장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정체성까지 생각해보게 한다. 장춘자가 탈북자를 돕는 마음은 인간이 가져야 마땅한 마음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그런 마음은 해주가 용준을 돕는 마음과 윤송이를 베르크 사람들이 보살펴주는 마음과 같다. 탈북자에 대한 냉담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쩌면 잊고 지낼 수도 있을 인간적 마음을 환기해주고 있다. 희미하게 남아있더라도 어딘가에 있는 그런 마음들이 제목의 의미와 맞닿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 속 아래 문장처럼 말이다.
“햇볕을 커튼이 먹어버린 것처럼 더 이상 빛이 실내로 들어오지 않았다. 햇빛은 어느새 누렇게 변해 있었다. 갈색 커튼에는 나무 그림자가 부조처럼 새겨졌다.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해주는 생각했다. 세상일들은 알 수 없는 채로 일어나기도 한다고. 슬픔은 개별적으로 일어나지만, 그 끝마다 닿을 부분을 내어준다는 것이 참 신기한 일이라고.”(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