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신산했던 여성들의 삶
스물두 살에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제르베즈는 아이들의 아버지인 랑티에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허름한 봉쾨르 여관에서 살림을 꾸리기 시작했지만, 랑티에는 같은 여관에 투숙했던 여자와 달아나버린다. 제르베즈는 절망했지만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 세탁일을 하며 억척같이 살아간다. 제르베즈가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열심히 일해서 배불리 먹고 몸을 누일 방 한 칸 장만하고 남자에게 매 맞지 않고 아이들을 잘 키우다가 자신의 침대에서 죽는 삶이다. 엄마가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살면서 고생만 하다가 일찍 죽은 걸 봐왔기 때문에 그것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랑티에가 떠난 후 함석공 쿠포가 적극적으로 다가와도 선뜻 마음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확고한 삶의 계획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쿠포 역시 술에 취해 일하다가 머리가 박살 나서 죽은 아버지 덕분에 술을 멀리하기로 결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제르베즈의 생활력에 반해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한다. 제르베즈는 다른 여자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먹고 노는 것밖엔 모르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런 행운이 있을 수가! 제르베즈는 그런 여자들하고는 전혀 다른, 인생을 무척이나 진지하게 살아가는 여자였다.”(81)
쿠포의 구애를 거절하던 제르베즈는 쿠포의 누나들이 살던 7층 건물을 방문한 후 마음이 흔들린다. 바깥에서 볼 때는 “살아 있는 거인”같은 건물을 보면서 “도시의 심장 속”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더 커다란 인상을 받는다. “건물에서 바글거리며 서로 부대끼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온갖 냄새가 뜨거운 열기와 함께 그런 그녀의 얼굴을 한꺼번에 강타하는 듯했다.”(91)
결국 둘은 결혼하기로 하고 결혼식 파티를 하는데, 어중간하게 비는 시간에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들이 박물관을 구경하러 간 장면 묘사와 그들의 반응이 매우 인상적이다.
“일행은 살롱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제르베즈는 <가나의 혼인 잔치>가 무엇에 관한 그림인지를 물어보았다. 액자에 그림의 주제를 적어놓지 않은 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나리자> 앞에 멈춰 선 쿠포는 그림 속 여인이 그의 숙모 중 한 사람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보슈와 비비라그리야드는 벌거벗은 여인들의 모습을 흘끗거리면서 히죽댔다. 그중에서도 그들의 눈길을 가장 끈 것은 안티오페의 허벅지였다. 행렬의 맨 끝에 있던 고드롱 부부는 스페인 화가 무리요의 <성모마리아> 앞에 이르자 무지와 감동이 동시에 드러나는 눈빛으로 한동안 그림 앞에 머물러 있었다. 남편은 입을 헤벌리고, 아내는 배에 손을 올려놓은 채.”(127)
세탁장 안에서 제르베즈가 비르지니와 치고받으며 격렬한 싸움을 벌이던 장면과 더불어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의 반응은 하층민들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허세와 가식 없이 보이는 그대로 미술 작품을 판단하고 감상하는 순수한 눈빛들이 어린아이들의 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더해서, 세탁소를 차리고 나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후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벌이는 제르베즈의 파티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잔뜩 기대에 차서 모여 배가 터지도록 준비한 음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 안에는 그들의 소박한 욕망과 질투, 삶에 대한 태도들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삶에서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제르베즈가 말한 것처럼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아이들을 잘 키워낼 수만 있으면 된다. 엄살을 부릴 줄도 몰라서 제르베즈는 아이를 낳자마자 사흘 만에 일터로 돌아간다. 결코 인색하지도 않고 옹졸하지도 않아서, 자신이 버는 만큼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쓸 줄도 안다. 부르주아들이 기피하는 위험하고 힘든 일도 기꺼이 해내면서 열심히 살아간다. 그저 바라는 것이라고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길 수 있는 하루 정도일 뿐이다.
“고객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려면 자신들은 정말로 밥 먹을 시간조차 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평생 죽도록 일만 할 수는 없었다! 자기들은 충성스러운 개가 아니었다! 절대로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318)
그런 그녀에게 언제나 삶의 그림자처럼 드리운 위협은 알코올이다. 지붕에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쿠포는 제르베즈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술을 마시러 다닌다. 남편이 기죽을까 봐 별말 없이 자신이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을 찔러주니까 쿠포는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언제나 이중의 약자였던 여자들의 삶이 제르베즈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분명히 강인하고 주체적인 모습을 가진 여성인 제르베즈가 열심히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감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불행에 빠질 것 같은 전조를 여기저기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당대의 사회상을 가감 없이 그려낸 자연주의 문학으로만 알고 있던 이 소설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여성주의 문학으로도 보인다. 제르베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녀가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그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사회와 남성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묘사는 그 시대와 인물을 여전히 살아 숨 쉬게 만들고 있다. 150여 년 전의 소설이라는 시간적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런 문학적 힘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