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과 함께 타이완을 시간여행하는 기분
겁이 많아서 무서운 영화는 잘 보지 못한다. 귀신이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보고 나면 한동안 악몽에 시달리고, 머리를 감을 때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도 눈을 감지 못한다. 하지만 귀신이 나오는 책은 좋아한다. 귀신이 등장하는 책은 대체로 결말이 권선징악이라서 그렇다. 그런 결말이 시시할 때도 분명히 있지만,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결말로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점에서 병든 마음의 치료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체념하듯 받아들여야 하고 권력자들의 어이없는 짓들을 실시간으로 봐야 하는 현실에서는 청량음료 같은 것이기도 하다.
여기 우리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질곡의 역사를 거쳐온 나라가 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우리에게도 있었던 부뚜막 귀신, 서낭당 귀신, 처녀 귀신, 몽달귀신 등등처럼 수많은 귀신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그곳에 귀신이 많은 이유는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지배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걸 반증한다. 그런 이야기를 귀신을 빼고 썼다면 이야기를 신파로 흐르기 쉬웠을 것이다.
용징이라는 타이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톈홍은 일곱 남매의 막내이며 동성애자이다. 톈홍이 태어나고 자란 지역은 중심에서 떨어진 낙후한 곳이라서 스스로 ‘귀신들의 땅’이라고 부른다. 귀신들이 살기 좋은 땅이며, 귀신들이 살 수밖에 없는 곳으로써, 귀신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귀신들의 땅은 황량했다. 그렇다면, 귀신은 정말로 있는 걸까. 시골 들판에는 도깨비들이 무수하고, 그들 대부분은 사람들의 입속에 살고 있었다.”(16)
좁아터진 지역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문은 그 무엇보다 더 강력하고 파괴적이다. 그들이 믿고 있던 미신과 전통과 관습의 힘이 결합하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쯤은 별로 큰일이 아니다. 여전히 가부장적이며 남아선호 사상이 굳건하며 민간 신앙이 확고한 그 지역에도 세계화를 비롯한 변화의 바람이 밀어닥치지만 건강한 전통 위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문제들에 하나하나 얼굴을 입혀주고 있는 것이 바로 톈홍의 남매들이다.
첫째 딸 천수메이는 무능한 남편 때문에 불행하고, 둘째 딸 천수리는 공무원으로서 사는 삶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밍르 서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존재다. 셋째 딸 천수칭은 가장 뛰어난 인재여서 유명 앵커랑 결혼했지만 가정폭력을 숨기며 살아간다. 넷째 딸 천쑤제는 부자인 샤오왕과 결혼해서 백악관에서 살고 있지만 방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다. 다섯째 딸 천차오메이는 용징에서 가장 예쁜 아이였지만 넷째의 질투와 샤오왕의 변심으로 자살하고 만다. 첫째 아들인 천톈이는 향장까지 하지만 부패 혐의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다 온 후 백악관에서 관리인 노릇을 한다. 막내아들인 톈홍은 작가이자 동성애자로 베를린에서 만난 T와 결혼하지만 그가 극우주의자가 되어 이상해지고 난 후 사고로 죽이고 감옥에 간다.
그들 모두 각자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서로에게 위로가 되거나 힘이 되어줄 기회는 없었다. 그들이 아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라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밖에 없다. “어렸을 때 그녀는 죽으면 그만이라고, 귀신이 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집에 딸 하나 줄어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137) 귀신이 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공간은 모든 문제가 응집되어 있는 곳이고, 그 문제들을 결코 표면화할 수 없는 곳이다. 그 모습을 가장 예민하게 바라보는 인물은 이중으로 억압된 인물인 톈홍이며 귀신이 된 톈홍의 아버지 아산이다. 아산 또한 비밀을 숨기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비밀을 밝힐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귀신도 고독한 존재라는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나는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면 다른 귀신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귀신이 되고 나서야 귀신은 가장 고독한 존재이며 공간과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이나 사건과도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151)
동성애자의 삶을 아산과 톈홍이 보여주고 있다면 여성의 신산한 삶은 어머니 아찬과 딸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시대적 한계에 가장 억압된 인물이라고 하면 아찬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많은 아찬이 귀신이 된다면 악귀가 되어버릴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지만-대나무숲의 귀신도 그렇고 버드나무 여자 귀신도, 도랑의 물귀신도 그랬듯이-, 아찬은 사뭇 다른 형태로 등장해서 자식들에게 울음을 멈추라고 한다.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귀신의 궁극적 의미를 맡기고 있는 것 같다. 어머니-귀신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치유를 담당하며 카타르시스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대만판 가족사 소설이면서 판타지적 면모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사실이 결말에서야 드러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읽는 재미와 함께 대만의 풍습을 알게 되는 낯선 즐거움도 담고 있다. 하지만 담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탓인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서 정제되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