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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긍지>

상처 받은 삶에서 긍지를 찾고 싶다면

by 초콜릿책방지기

이토록 여성적인 글이 또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그렇다면 여성적인 글이란 무엇일까. 나를 세상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세상이 그걸 허용하지 않기도 하니까!) 세상과 나의 긴장 관계를 풀어내어 세상이 나에게 오도록 만드는 것이 그런 글쓰기가 아닐까. 작가에게는 글쓰기 자체도 세상을 자신에게로 이끄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포도 덩굴손에 얽매이게 되어도 계속 노래하는 밤꾀꼬리는 작가 자신의 모습인데, 자신을 속박하고 상처 주더라도 계속 노래하겠다는 의지는 말하려는 의지와 연결된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느끼는 모든 것, 나를 매혹하고, 상처 주고, 놀라게 하는 모든 것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싶다.”(20) 자신을 드러내려는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스스로를 전시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지도 알고 있는 영리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의 문장치고는 매우 몽글몽글한 느낌이다. 굴곡이 많은 삶에 강한 의지가 동반된 사람에게서 엿보이는 뾰족함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친구인 발랑틴과의 관계에서부터 개와 고양이까지 자신과 관계를 맺는 대상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갖고 대한다. 함부로 재단하거나 섣불리 충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개와 고양이에 향하는 애정은 그들의 입으로 자신에 관해 말하도록 하는 것으로 드러내는데, 개의 특성과 고양이의 특징을 정확하게 잘 집어내서 보여준다. 개는 외적인 관찰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면 고양이는 심리적 묘사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섬세한 묘사들은 아마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의 목소리가 이렇게 소박하고 다정한 것은 나중에 올 독자들이 그녀를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커다란 장점이다. 허세 없이 얼마나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는지 투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에 공감할 수 있고 그녀에 대한 호기심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아래와 같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뭐? 내 인생 또한 부질없다고? 천만에, 토비. 난, 난 사랑을 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너무나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내가 얼마나 아름답게 가꾸는지, 내가 얼마나 기쁘게 사랑에 헌신하는지 네가 알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떤 열정과 상처로 내 사랑을 가득 채웠는지 네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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