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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한 받아쓰기 혹은 에피파니의 순간

by 초콜릿책방지기

이 책은 규정하거나 규정당하기를 거부한다. 형식적으로는 운문과 산문에 걸쳐져 있으면서 사진과 서예, 해부도 같은 시각적 이미지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은 동서양을 넘나들고 있으며 주인공은 물론이고 화자도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완결된 구성이지만 전체적으로 완결성을 향해 일관된 흐름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읽히는 동시에 읽히지 않는다. 작가는 쓰는 사람인 동시에 받아 적는 사람이다. 쓴다는 주체성과 받아 적는다는 수동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역사에 주체적인 흔적을 남긴 이름 있는 여성들이 등장하고 남성을 섬기며 수동적으로 일상을 살아왔던 이름 없는 여성들도 그려지면서 그 두 가지 의미가 작가로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조응한다.


작가가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신내림’으로 명명할 수도 있었을 순간들이 여기서는 에피파니의 순간으로 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의 말, “육신보다 더 적나라하고, 뼈대보다 더 강하며, 힘줄보다 더 질기고, 신경보다 더 예민한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이라는 말을 제사에 인용한 것은 이 책이 에피파니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차에 나온 9명의 그리스 여신들은 모두 뮤즈, 이 책의 모든 것에 영감을 내려준 준재들이고 작가는 스스로를 DISEUSE(화술가, 점술가, 운명을 말하는 사람)으로 명명한다. 여신들에게 빙의되거나 그들이 차학경의 입을 빌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의 뮤즈인 클리오의 입으로는 유관순을 말한다. 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어린 여자 구원자를 내세우고 있다. 그녀의 행동과 삶이 불멸을 만들어냈으며, 작가가 그것을 지금 다시 불러내는 이유는 역사를 잊고 나면 여전히 똑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한다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서사시의 뮤즈인 칼리오페의 입으로는 어머니를 불러온다. 작가에게 어머니는 최소의 소리와 말, 개념이다. 그런 어머니의 삶을 일부 보여주고 있는데, 그녀가 겪었던 삶의 어려움, 죽음에의 유혹에 가까운 그것을 예수가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당하는 것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어머니의 사진과 외할머니의 사진을 처음과 끝에 배치하면서 그녀가 잇고 있는 계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천문학의 뮤즈인 우라니아는 이제 몸속으로 들어간다. 피와 뼈가 어떻게 잉크가 되는지, 무의식에서부터 단어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보여준다. 비극의 뮤즈인 멜포메네는 분단된 우리나라 지도와 함께 근대사의 아픔을 말한다. 민주화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목숨을 걸고 시위에 나가려는 오빠와 그것을 막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면서, 역사 속의 수많은 기만과 상실, 감춰진 것들에 대해 말한다. 국가에 대해 적대하고 대항하는 그녀, 그것의 의미는 반역이 아니라 비극 그 자체다.


연애시의 뮤즈 에라토는 신에 대한 사랑과 남녀 간의 사랑을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여기에서는 성녀 테레즈의 순교, 지극히 희생적 사랑이 주요 테마인데, 그것은 이상하게도 사라지지 않는다. “새하얀 세상 속에서/구별되지 않는 그녀의 육신은 변함없고 상치됨 없이/마찬가지로 언제나 조화로운 그녀의 육체는 계속/분해되고 침식되어 당신의 육체가 된다.”(130) 같은 민족인 유관순과 혈연인 어머니의 계보만을 잇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 계보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제 서정시의 뮤즈 엘리테레가 말한다. 점술가인 그녀가 저주를 깨뜨리도록 하라고 명한다. 그녀, 뮤즈에게서 현현의 순간을 맞이하고, 받아 적는 그녀, 그녀로 하여금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어 쓰는 것을 통해서 다시 의미를 찾으라고 말한다. 만세운동사진을 넣은 것은 기억을 소환해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희극의 뮤즈 탈리아는 말로 다시 돌아오기에 대해 말한다. 극장에 들어가 반복적으로 보는 것처럼 글을 통해서 망각을 되돌리고 잊힌 사람들을 재생한다. 또한 글을 쓰면서 “실제의 시간을 폐기하고”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합창 무용의 뮤즈 테르프시코레는 깨진 언어로 다시 말한다. 그녀가 가진 언어는 말 비슷한 피진어지만 그대로도 말할 수 있다. 돌조차도 시간의 흐름 안에서 변형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모든 기억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노래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시의 뮤즈 폴림니아는 이제 다시 처음으로 간다. 돌고 돌아서 하나로 연결된다. 병든 어머니를 위해 약을 구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를 위해 우물가에 있던 여인이 특별 치료제로 준 선물은 열 번째 주머니다. 아홉 점은 연결되며 열째는 동심원의 연속이다. 원 속에 원이 있고 그것들은 무한 속에 있게 된다. 여기서 시공을 초월한 영원성이 완성되고 이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는 완성된다.


전체적 주제가 하나로 연결이 되고 꽉 짜인 구성이긴 하지만, 서사적 맥락은 연결되지 않으므로 우린 이 책을 전시된 작품처럼 감상하면 된다. 어디든 상관없이 특별히 영감을 주는 뮤즈 앞에 멈추어서 그곳에 오래 머물면 된다. 그것이 바로 작가와 함께 동시에 에피파니를 경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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