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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미스터리 형식으로 만나는 한강의 소설

by 초콜릿책방지기

한강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다 보니 작가가 천착하는 대상과 생각, 인물들이 대략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대상이라고 하면 눈, 차가움, 겨울, 흰, 먹지 못함, 잠들지 못함 등등이 떠오르고, 작가가 주로 드러내는 생각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은 죽어가고 있을 그 시간에 어떤 사람은 태어나는 그 우연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죽은 언니의 시간을 대신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은 어떤 의미인지, 어떤 죽음 혹은 어떤 삶이 그저 의미 없이 지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들 같은 것이 생각난다. 인물이라고 한다면 이혼해서 혼자 아이를 키우다가 빼앗기는 여자, 목공일 혹은 그림 등 예술에 관련된 여자, 지독한 고독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는 여자 등등이 떠오른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로 한때는 희곡을 썼지만 지금은 번역일을 하며 혼자 살고 있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대체로 물욕을 비롯한 욕망이 거세된 것처럼 보이는 이 여자들은 소박하게 살고 있지만 어떤 관계 혹은 어떤 예술적 대상 앞에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정희도 마찬가지로 인주의 삶이 잘못 알려지지 않길 바라는 욕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가부장적 집안에서 남자들에게 착취당하던 삶을 버티던 정희에게 인주와 인주의 삼촌이 살던 집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주던 곳이다. 그곳에서 삼촌과 함께 그림을 그리던 정희는 삼촌이 죽고 난 후 유부남을 만나서 삼 년간 결혼생활을 하다가 헤어진다. 그사이에 인주도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이혼을 한다. 정희와 인주는 계속 서로를 챙겨 왔지만 인주가 죽기 전 몇 년은 연락을 끊는다. 정희는 인주의 죽음이 석연찮다는 생각과 함께 그녀를 위한 전시와 책을 준비하는 강석원의 뒤를 쫓다가 인주의 어머니와 관련된 비밀을 알게 된다.


이야기의 뼈대만 정리하고 나면 사실 그리 특별하다고 말할 수 없는 불행하고 예민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토록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인주와 정희의 삶에 살을 붙여주는 특별한 문장들이 있다. 밀도와 농도가 모두 짙은 그 문장들 앞에서 독자들은 오래 숨을 멈추게 된다. 그게 바로 한강 작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색채들의 충돌이 인간의 내부에서 스며 나오는 감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나는 놀랐다. 시작도 끝도 없던 혼돈이 방금 갈라져 피 흘리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그토록 단순한 구도의 비구상 화면에서 극적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45)


정희가 삼촌의 그림을 보고서 느낀 것을 묘사하는 이런 문장들이 마치 그림 앞에 서있는 것처럼 우리를 멈춰 세운다. 문학잡지에 연재하던 것을 고쳐서 완성한 소설이라서인지, 전체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늘어지고 설명적인 구석이 좀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 되었던 이유는 문장으로 비구상 그림을 설명하는 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보지 못했지만 마치 본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문학의 힘과 주제를 매끈하게 정리해 주는 정희의 희곡 <닥쳐>와 같은 것들이 미시령 사진에 대한 개연성을 실어주는 것 같다. 어떤 소설의 개연성은 이야기가 아니라 문장으로도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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