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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노래>

계엄이 성공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의 생생한 모습들

by 초콜릿책방지기

어떤 소설은 읽는 동안에도, 읽고 나서도 고통스럽다. 이렇게 말하면 우린 가장 먼저 한강 작가를 떠올리게 된다. 소설의 테마는 대부분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에 관한 것인데도 우리가 유독 한강 작가를 떠올리는 이유는 소설의 제재나 주제 때문이 아니다. 고통에 대해 말하는 방식 때문이다. 작가가 얼마나 더 깊이 그 고통 속에 침잠한 채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지 읽는 동안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한강의 그런 점을 닮았다. 내전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데, 읽는 내내 아일리시의 고통 속으로 생생하게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이런 소설은 드물다. 소설은 마치 아일리시의 눈으로 만들어진 카메라를 독자 눈에 장착해서 그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만드는 것 같다. 시선이 닿는 곳에서 발생하는 감정은 아일리시가 처한 상황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아일리시가 살고 있는 아일랜드는 정권이 바뀐 후 갑작스럽게 전제주의 국가가 되어버린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동시에 우리나라의 계엄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만약 계엄이 성공했다면 이 소설의 상황은 우리에게도 일상이 되었을 것이고 수많은 아일리시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아일리시처럼 교원노조에서 활동하던 남편 래리에게 옳은 일을 하라고 다독였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래리가 실종되어 버린 후, 그게 아일리시의 잘못은 아니지만 정의로운 일보다는 우리의 안전을 우선시하자고 말하지 않은 것이 후회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일리시와 래리에게는 네 명이나 되는 아이도 있으니까.


이제 막 성인의 문턱 앞에 있는 큰아들 마크는 자신이 나서서 아버지를 찾고 싶다. 아일리시는 국가에서 군인으로 징집한 마크를 몰래 국외로 내보내기 위해서 손을 쓰지만 마크는 정권의 억압에 반발한 사람들이 조직한 반란군에 들어가 버린다. 래리와 마크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일리시는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남은 세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내전 상황은 더 심각해지고 아일리시 가족은 전쟁의 한복판에 들어가게 된다.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아일리시의 동생 아냐는 아일랜드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보고 남은 아일리시의 가족들과 아버지를 탈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상황에 매몰된 아일리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아마도 전제주의 체제나 내전과 같은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벌어지기는 했지만 조만간 끝날 비극이라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전은 더 격렬해져서 아일리시의 집은 폭격으로 피해를 입고, 둘째 아들 베일리마저 죽게 된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아일리시는 딸 몰리와 막내아들 벤을 데리고 탈출길에 오른다. 국가 폭력에 맞서다가 탈출하는 난민의 신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일리시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모나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의 저는 자유 의지를 믿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가 봐요,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난 내가 새처럼 자유롭다고 말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이런 기괴한 일에 휘말렸는데 어떻게 자유 의지가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한 가지 일이 다른 일로 이어지고, 결국 그 빌어먹을 사태가 스스로의 동력을 찾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알겠어요, 내가 자유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오직 노력이었나 봐요, 자유는 애초에 없었나 봐요,”(352)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웠던 소설 속 상황에서 나와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현재 아일리시가 겪고 있는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빌어먹을 사태가 스스로의 동력을 찾”을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어쩌면 상식이라든가 자유 의지라는 개념은 어떤 기괴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어쩌면 소설 속 상황이 현실과 많이 다르지 않아서 고통이 더 생생하게 경험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그리고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현실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일리시라는 한 개인이 대표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현실을 좀 더 선명하게 들여다보게 되고, 그곳에서는 일어났지만 여기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언제든 여기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예언자의 노래에도 귀 기울이게 된다.


“예언자의 노래는 그 어느 때나 항상 반복되던 똑같은 노래임을 깨닫는다. 칼의 도래, 불에 삼켜지는 세상, 정오에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태양, 어둠에 잠긴 세상, 곧 눈에 보이지 않도록 쫓겨날 사악함에 대해서 예언자가 길길이 날뛸 때 그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신의 분노, 예언자가 노래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과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의 종말이다. 세상은 어느 곳에서는 늘 끝나고 또 끝나지만 다른 곳에서는 끝나지 않는다.”(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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