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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전나무의 땅>

정신없는 일상에서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읽어주세요

by 초콜릿책방지기

해운업이 쇠락하고 난 후 인구가 소멸되어 가는 뉴잉글랜드의 한 작은 마을이 있다. 이 조용하고 작은 마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화자가 글을 쓰러 들어간다. 더닛 랜딩이라는 이 마을은 배로 들어가야 하는 고립된 지역이며 대체로 나이 든 사람들이 띄엄띄엄 살고 있으니 글을 쓰기에는 최적의 마을인 셈이다. 화자가 세 들어 살게 된 앨미리 토드 부인의 집은 다른 집에서 떨어진 집이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서 지내다 보니 토드 부인과 우정을 쌓으며 마을 사람들을 만나느라 글을 쓰기가 여의치 않다. 약초로 치료제를 만들어서 파느라 이모저모로 바쁜 토드 부인과 지내는 것은 글쓰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지만 화자는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주변에 있는 빈 학교를 다시 세내어 그곳에서 글을 쓴다. 무언가 화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닌 한 그 마을에 있을 이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적으로 화자가 함께 있는 토드 부인이 화자의 마음을 끈다. “사교술이란 결국 일종의 독심술이며, 나를 맞아준 부인에게는 그 귀한 재능이 있었다. 공감은 마음뿐만 아니라 정신의 산물이기도 하고, 블래킷 부인과 내 세계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하나였다. 게다가 부인에게는 궁극의 재능, 천상이 허락하는 가장 고매한 재능이 있었으니 바로 완전한 이타였다.”(75) 타인을 향해 항상 열려있는 그 마음에 화자도 자꾸 이끌린다.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고립되어 살기를 자초한 조애나의 선택을 존중하면서 그녀를 보살펴주기도 한다. “나는 한 사람에게 그 정도의 자유와 자발적인 은둔을 허락하는 사회란 어떤 곳일까 고민했다.”(107) 따지고 보면 조애나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보살펴주고 너그러이 대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을은 지옥과 같은 감옥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챙기며 살아간다. 화자는 우리 모두가 누구나 어느 시대에 어느 곳에서 살든 어떤 순간에는 은둔자 혹은 외톨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한다.


들여다보면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막상 듣다 보면 지루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화자는 좀 더 이 마을 깊숙이 애정을 가지게 된다. 리틀페이지 선장의 판타지 같은 이야기며 다정한 포스딕 부인, 누구나 좋아하는 블래킷 부인, 순정남 틸리씨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치 위태로운 북클럽에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은 숨을 돌리며 잠시 멈춰 서서 가만히 있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이런 여름의 행복에도 한계는 있겠으나 단순한 생활이 주는 편안함은 충분히 매력적이라 소박한 삶에 결핍된 바를 채워주었고, 평화가 선사하는 선물은 분투하듯 살아가는 자들이 누리기 어려운 법이었다.”(193)


이곳의 또 다른 매력은 자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모두 나이가 들었고 더 이상 젊은이들은 남아있지 않은 이곳에 자연만 창창하고 무성하다. “길게 펼쳐진 해안을 빽빽이 뒤덮은 뾰족한 전나무들은 짙은 녹음을 업은 모습이 마치 출전을 앞둔 대군 같았다. 저 멀리 바다 먼 곳의 군도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 전나무들은 바다를 향해 행진하려는 듯, 일정한 걸음으로 언덕을 넘어 저 아래 물가까지 나아가려는 듯 보였다.”(49) 그저 그곳에 있는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그곳이야말로 휴식과 같은 곳이며, 일상에서 벗어나 영감을 얻는 곳이다.


작가는 화자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시종일관 평온한 톤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루하다고 느끼지 않게 만드는 작가적 영민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 분명히 있다. 포스딕 부인과 토드 부인이 옛날과 현재를 비교해서 말하는 장면을 보면 화자의 생각이 중간중간 들어가면서 긴장감과 사고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분명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은 없지만 그런 방식의 진술을 통해서 이렇게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이야기를 재밌게 만들 수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리틀페이지 선장이 말하는 판타지적인 세계가 이 뾰족한 전나무의 땅에서도 느껴지는 것이다.


“가장자리에 내리 꽂힌 햇살 덕분에 이 세상 너머의 세상, 어떤 사람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믿는 세상이 문득 모습을 드러낸 듯했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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