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에서 찾은 검은색의 의미
이 소설의 구조와 인물들은 『바람이 분다, 가라』와 조금 닮아있다. 사라진 인물을 추적해 가는 방식의 구조도 그렇고 각자의 사연을 품고 있는 인물들이 그 아픔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지만 의지할 수 없는 것도 비슷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여수의 사랑』도 그렇다. 자신 속으로 침잠해 있는 강인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태생적 아픔의 커다란 구멍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의선의 모습에서는 자흔이 엿보인다. 그런 자흔과 같은 방에서 잠깐이나마 살았던 화자는 인영과 비슷하다.
명윤의 어떤 면은 『희랍어 시간』도 연상시킨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던 명윤이 전혀 모르는 언어를 배우고 싶다며 일본어를 배우겠다고 하는 대목은 희랍어를 배우는 주인공이 생각나게 한다. 자주 토악질을 하는 의선과 같은 인물은 꽤 많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아무래도 『작별하지 않는다』의 주인공이 그런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었던 것 같다. 또한 늘 해를 쬐면서 육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식물처럼 보이는 특징은 『채식주의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한강 읽기 모임이 끝나고 나면 한강 작가의 작품 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처럼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검은 사슴』이 한강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개별성을 띄는 가장 큰 특징은 ‘검은’이라는 색채적 이미지다. 압도적으로 흰 이미지들로 가득한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이 소설은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듯 하지만, 읽고 나면 색의 차이가 작가가 천착하는 주제의 차이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탄광촌의 이미지가 반영된 검은색의 이미지가 고귀하고 섬세한 동물처럼 여겨지는 사슴과 결합되어 의선을 비롯해서 탄광촌에서 살던 인물들의 모습을 제목만으로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탄광촌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태어났다는 의선은 이 소설의 뼈대가 되는 문제적 인물이다. 대로에서 발가벗고 걸어 다니는 이상한 행동을 하던 의선을 보호해 주던 인영과 명윤은 어느 날 갑자기 의선이 사라지자 얼마 되지 않는 단서를 가지고 그녀를 찾아 나선다. 인영과 명윤이 의선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서서히 드러난다. 어둡고 아무것도 없는 바다 사진만을 찍는 인영에게는 그런 바다에 빠져 죽은 언니가 있었고, 의선을 찾고 나면 그 의미를 알게 되리라 믿었던 명윤에게는 자꾸만 도망치던 동생 명아가 있었다.
그들이 의선을 찾기 위한 명목으로 찾아간 탄광촌에서 만난 사진작가 장종욱은 그 도시의 산증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 도시와 장씨는 매우 비슷하다는 느낌을 전해주는데, 도시에 대한 묘사만 봐도 장씨라는 인물과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문득 이 도시가 나에게 무척 낯익게 느껴졌다. 아니, 처음 역에서 내렸을 때부터 이 도시의 무엇인가가 이상한 친밀감을 불러일으켰었다. 무엇 때문일까. 이 도시는 어둡고 고요하고 검었으며, 시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지역들이 황폐하게 버려져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내가 살았던 공간에서 버림받은 것들이 모두 모여 이루어진 다른 공간 같았다. 아니, 땅 위 세계의 반대편으로, 지구의 핵을 향해 컴컴한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도시 같았다.”(232)
의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상처받고 가난했던 날들을 떠올리는 인영과 명윤에게 그 도시는 그들의 내면과 비슷했다. 상처에 익숙해진 것처럼 어둠 속에 있는 것에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지만 그들이 어둠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마치 검은 사슴처럼 말이다. 황금빛 뿔을 떼어주고, 이빨을 빼앗기더라도 그곳에서 탈출하고 싶지만 그 안에서 녹아내릴 뿐 다른 길은 보이지 않는다.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으며 소리없이 멀어져가는 허공의 푸른빛을 향하여 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저 푸른빛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둠의 속으로, 태어났던 곳으로, 태어나기 전의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일까.”(10)
인영과 명윤, 의선과 장씨 모두 태초의 우리는 어둠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잘 감각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혹은 어두운 현실에 대해 보다 더 예민한 촉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인물들을 만나면서 어둠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태생과 현실에 빛 아니면 어둠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절반의 비중을 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