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된 세계를 보며 생각해 보는 우리의 미래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이웃 나라인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이웃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발생하는 영향과 공포는 상당했고, 사고 처리수 문제부터 농수산물 수입까지 여러 문제들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모든 일이 그렇듯 나에게 닥친 일이 가장 심각하고 힘든 법이라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기회는 없었다.
이 소설은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세상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처럼 변해버린 상태에 처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세상이 뒤집힌다는 것은 기존의 질서뿐 아니라, 의식주와 언어, 생체 시계와 성별까지 모든 것이 전복되거나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요시로와 무메이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런 세계가 구체화되어 우리 앞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작가는 번역가이며, 번역가가 보스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납득하게 된다.(이 작품집 안에서 그런 주장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목에서 작가의 유머감각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보이는 세상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까지도 우리에게 번역해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고 이후에 일본은 쇄국 정책을 시행하고, 정부는 민영화되며, 수출입이 제한되어서 식료품이 부족한 상태에서 요시로와 무메이는 살고 있다. 요시로는 백 살이 넘었지만 혈기왕성하고, 무메이는 열다섯이 되어가지만 음식물을 삼키는 것조차 어려워하고 잘 걷지도 못한다. 방사능의 영향으로 아이들은 쇠약하고 노인들이 몸으로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전복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요시로는 증손자인 무메이를 건강하게 키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요시로의 아내인 마리카와 무메이의 선생님인 요나타니는 아이들 중 한 명을 외국에 사절로 보내서 이 상황을 개선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선생이 소속된 ‘헌등사 모임’은 적합한 인재를 찾아서 외국에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 어린이들의 건강 상태에 대해 제대로 연구할 수 있고, 외국에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참고가 될 터다. 이제 미래는 지구의 둥근 곡선에 따라 생각할 수밖에 없음이 명백했다. 번듯해 보여도 쇄국 정책은 어차피 모래성. 어린이용 삽으로도 조금씩 부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또는 그 한 사람과 민간 차원에서 선발한 젊은이를 외국으로 보내야 한다고 헌등사 모임은 생각했다.”(143)
미래 세대의 아이들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은 지구가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을 일깨울 뿐 아니라, 일본이라는 한 지역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났으니 그 지역을 폐쇄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발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런 일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으며, 미래 세대가 가져야 할 자원을 담보로 해서 현재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그 사실에 대해 각성하지 않는 한 우리 또한 요시로의 고뇌를 맛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없이 과거를 배회해야만 할 수도 있다.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과거에 저지른 큰 잘못이 가슴 안쪽을 무자비하게 긁는다. 그 잘못 때문에 자기들은 감옥에 갇혔다. 격자로 된 전봇대 때문에 신선이 사는 저편의 나라로 가지 못함을, 매일 아침 깨닫는다.”(146)
언뜻 보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요시로가 부러울 수도 있지만, 아픈 증손자를 앞에 두고 자연에 흐름에 맞는 죽음을 맞이하지도 못하는 상태는 천벌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로와 무메이가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은 한 가닥 희망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요시로의 시점으로 말할 때는 활기가 느껴지고 무메이의 시점으로 말할 때는 애어른처럼 느껴지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고, 언어를 수출한다는 발상 또한 재밌는 발견이다.
함께 수록되어 있는 다른 단편들은 사고 이후의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그리고 있는데 각 단편 또한 인상적이다. <빨리 달려 끝없이>는 여성의 욕망과 관능을 한자 언어를 변형시키면서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불사의 섬>은 고립된 일본에 밀항해 들어간 사람이 쓴 책을 통해 그 실상이 알려지게 되는 이야기인데, <헌등사>의 일부 내용이 짧게 요약되어 있다. <피안>은 재난 후 일본을 탈출하는 사람들 중 남근 욕망 덕분에 유명한 정치인이 된 세데라는 인물에 대해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다. <동물들의 바벨>은 인간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동물들끼리 이루어진 대화인데, 우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굉장히 많은 상징들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