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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나라>

슬픈 역사는 물려주지 않기를.

by 초콜릿책방지기

프랑스인 아버지와 르완다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가비(가브리엘)는 브룬디에서 살고 있다. 어머니가 르완다 내전으로 인해 난민이 되어 브룬디로 왔다가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했기 때문이다. 브룬디에서도 백인들이 사는 지역인 부유한 동네에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던 가비는 그저 부모님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란다. 언제나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프랑스에 가서 살기 원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다. 프랑스로 돌아가면 그저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만 브룬디에 머물면 특권층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네 프랑스의 평온함에서 벗어나 모험을 찾으려고 아프리카에 왔지. 대단하셔! 내가 찾는 건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안전함, 내 아이들을 죽음의 위험이 없는 나라에서 키운다는 편안함이야.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31)


아버지가 특권층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부줌부라에 머물면서 가비의 가족들은 브룬디까지 넘어오게 된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엘리트였던 알퐁스 삼촌도 르완다 애국 전선에 뛰어들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죽어버렸고, 외제비 이모할머니의 가족과 파시피크의 삼촌 모두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가비는 후투족이든, 투치족이든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잔인한 현실 앞에서는 그 생각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날 오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이 나라의 현실 깊숙이 들어갔다. 후투와 투치의 반목을, 저마다 한편이나 다른 편이길 강제하는 넘을 수 없는 구분 선을 발견했다. 아기에게 지어 주는 이름처럼 이 <편>은 태어날 때 정해지고 영원히 우리에게 따라붙었다.”(163)


제국주의가 남기고 간 폐해의 희생자는 결국 무고한 사람들이지만, 오랜 기간 뿌리 깊게 이어왔던 증오 앞에서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통치의 기술은 그 집단의 소수자에게 권력을 맡기는 것이라고 하는데, 점령국이었던 벨기에가 갑작스럽게 투치족에게 주었던 권력이 그렇게까지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리라고 예상하진 못했겠지만 분명 책임질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증오의 광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가비의 평화로운 유년 시절은 끝이 나고 가비의 친구들도 증오에 물들기 시작한다. 특히 내전 때문에 어머니를 잃었던 지노는 복수를 위해서 폭력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려고 한다.


“나는 지노에게 그가 잘못 생각하는 거라고, 일반화하는 거라고, 매번 서로 복수하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어머니에 관해 밝힌 사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가 슬픔이 너무 커서 이성이 억눌린 거라고 생각했다.”(206)


가비 역시 불행한 역사의 아픔을 비껴가지는 못했는데, 내전으로 인해 친족들을 모두 잃게 된 어머니는 정신을 놓아버리게 된다. 가비와 가비의 동생은 아버지가 손을 써서 프랑스로 대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자신을 돌보아주던 집사와 요리사가 모두 살해당하고 아버지마저 죽음을 면치 못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가비는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옆집에 살던 에코노모풀로스 아주머니 덕분에 책을 많이 읽었지만 현실은 책 속의 세계보다 더 잔혹하고 설명하기가 힘들다.


작가는 그 모든 역사적 불행에 앞에서, 어쩌면 인간은 모두가 비슷하게 가지고 비슷하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간접적으로 내비친다. 가비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동네에서 함께 지내던 아이들 중에서 몇 명이 유럽이나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 와서 신문물을 보여주고 나면 그전까지 유지되던 균질성이 깨지면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쁜 감정이 들어서는 것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 전까지 없어도 괜찮았던 것들을 갖지 못해 슬펐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우리 내면에서부터 바꿔 놓았다. 우리는 가진 아이들을 말없이 미워했다.”(138)


투치족과 후투족도 제국주의 국가가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사이좋게 잘 지냈는데, 둘 중 하나에게 주었던 특권으로 인해서 그들의 내면까지도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마치 아이들의 마음처럼 말이다. 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미워하던 것이 표면화되면서 비극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제 가비의 세계는 더 이상 중립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이웃이었던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하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집단 학살은 출렁이는 시커먼 기름띠이고 거기서 익사하지 않은 자들은 평생 검은 기름을 뒤집어쓴 채 산다.”(228)


열 살인 가비의 눈으로 본 아프리카의 비극은 그 학살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 인간은 무도함 앞에서 얼마나 무력했는지에 대해 더 극명하게 드러낸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봐도 이해하기 힘든 맹목적인 증오와 불합리한 사회 분위기를 어른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죽음과 증오에 대해서 어린아이는 또한 얼마나 깊은 무력함을 느낄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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