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몰입감으로 600페이지를 단숨에 읽게 만드는 힘
작가가 프랑스 사람임에도 소설의 배경이 되는 나라는 이탈리아의 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한 가문의 이야기이다. 실제로 바티칸을 좌지우지하던 가문이었던 오르시니 가문이 등장한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이탈리아의 피에트라달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오르시니 가문은 그곳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세력이다. 감발레 가문과 앙숙이긴 하지만 감발레 가문도 감히 오르시니 가문에 대적할 만한 힘은 없다. 중세부터 이어져 온 오르시니 가문은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전통의 상징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사라져야 할 세계이기도 하다. 이제 막 전기가 들어오기도 하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격변의 시대에, 오르시니 가문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든가 도태되든가 둘 중 하나의 길을 걸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 가문의 운명을 암시하는 대목은 큰아들의 죽음이다. 전쟁에 채 참전하기도 전에 열차 사고로 죽는 큰아들의 뒤를 이어서 가문을 책임지도록 남겨진 자식들은 스테파노와 프란체스코, 비올라이다. 상징적으로, 가장 영리한 자식이 비올라라는 사실은 오르시니 가문의 비극일까, 축복일까. 이야기는 가문 내 암투와 권력 다툼을 그리고 있을 것 같지만,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면서 재밌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딘가 <파리의 노트르담>의 꼽추를 연상하게 하는, 연골 형성 저하증을 가지고 태어난 비탈리아니라는 아이가 피에트라달바로 흘러들어온다. 조각가였던 아버지가 죽고,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어머니가 먼 친척이라고 하는 치오의 작업장으로 보낸 것이다. 비탈리아니는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서 타고난 조각가다. 외모로 인한 한계 따위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 자존심 강한 비탈리아니는 치오에게도 절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는다. 비탈리아니의 재능 덕분에 치오는 돈을 좀 벌게 되고, 비탈리아니는 자신이 만든 조각 덕분에 오르시니 가문과 엮이게 된다.
소설은 비탈리아니가 죽어가는 현재 시점과 과거의 일인칭 시점을 오가면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데, 끝없는 재미를 선사해서 놓을 수가 없다. 그 재미의 핵심에 연골 형성 저하증을 가진 인물의 입신양명이 들어있을 뿐 아니라, 도무지 굽힐 줄 모르지만 동시에 운명이 가져다주는 역경을 받아들일 줄도 아는 주인공의 천성과 유머를 잃지 않는 성격 덕분이다. 신기하게도 주인공 비탈리아니는 자신의 외모에도 불구하고 오만해 보일 만큼 자신만만하다. 아마도 타고난 재능 덕분인 것 같지만, 다행히도 그의 재능은 성품을 뒷받침할 만큼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흥미를 더하는 서술 방식 중 하나는 비탈리아니가 제작한 피에타의 비밀을 푸는 방식 덕분이다. 너무나 신비롭고 매력적인 데다 보기만 하면 문제가 생겨서 숨길 수밖에 없는 조각상이라는 설정 자체가 궁금증을 더해서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에 비견할 만하다는 평가에서 독자의 기대는 더 커지게 된다. 만약 비탈리아니의 피에타가 그만한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이 소설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야기는 분명히 피에타를 향해 가고 있지만, 읽고 있는 동안에는 눈치챌 수가 없다. 오르시니 가문의 운명과 비탈리아니의 운명이 바깥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파시스트 치하에서 격랑에 휩쓸리듯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가장 명석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신부가 된 프란체스코와 천재성을 타고난 비올라다. 프란체스코는 가문이 지속되는 방향에 대해서 끊임없이 체스를 두고 있다고 한다면 비올라는 가문의 현재성에 대한 인식을 가장 정확하게 하고 있다.
“내 부모는 늙었다고.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지. 그들은 앞으로 우리의 말을 타듯이 날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여자들은 수염을 달고 남자들은 보석으로 치장하리라는 걸. 내 부모의 세계는 죽었어. 넌 좀비를 무서워하지만 네가 무서워해야 할 건 바로 그 세계라고.”(145)
그런 비올라에게 비탈리아니가 매혹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비올라는 자신이 읽은 책을 갖다주고 지식을 전수하면서 비탈리아니를 성장시킨다. 정상성에서 벗어난 몸의 한계를 끊임없이 인식해야 하는 비탈리아니야말로 여성적 한계를 매 순간 느껴야 하는 비올라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아니야. 미모. 나는 네게 한계가 없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 위로도 아래로도, 큰 걸로도 작은 걸로도, 모든 경계는 만들어 낸 거야. 그 점을 이해한 사람들은 그걸, 그런 경계를 만들어 낸 사람들을 몹시 불편하게 하고, 나아가 그걸 믿는 사람들은 더욱더 불편하게 만들기 마련이야. 그러니까 거의 모두가 불편해진다고 할 수 있어. 마을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내 가족조차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알고. 난 상관 안 해. 모두가 네게 반대하면 네가 올바른 길에 들어선 것임을 알게 될 거야.”(199)
그렇지만 성공을 맛본 비탈리아니의 세계는 결국 남성의 세계라서 비올라가 말하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사회적 계급적 위계 안에서 차별에 대한 인식이 각성되었던 비탈리아니조차 오르시니 가문이라는 표면적 모습에 가려져서 비올라가 여성이기 때문에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고, 내 치명적 무기를 사용했다. 손짓으로 내 몸을 가리켰다. 「날 비난하지 마. 넌 내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 비올라가 똑같은 동작을 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넌 내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517)
비올라가 국회의원이 되지 못하고 죽는 것은 현실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녀가 누대에 걸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인물로 박제되었다는 사실이 더 큰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조각상이 논란이 되어서 지하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여자일 수 있다는 발상을 이토록 치밀하고 정교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책이 몇이나 될까 싶기도 하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방식에, 가장 치명적인 반전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랬다, 나의 형제들. 그날 폐허 속에서, 나는 깨달았고 나는 보았다. 당신들은 내게 화해를 위한 피에타상을 주문했었다. 그리스도의 망가진 육신을 안고 눈물 흘리는 성모 마리아를. 하지만 봐라. 만약 그리스도가 고통이라면, 그렇다면 당신들에게는 아무리 고깝더라도 그리스도는 여자가 아니겠는가.”(616)
밑줄 쳤던 문장들
“황금빛 바탕에 녹색 곰 한 마리와 그 위에 똑같은 색의 오렌지 두 개. 바로 거기에서부터 그 가족의 전설이 시작됐고, 나의 가장 커다란 고통과 가장 커다란 기쁨, 한마디로 저물어 가는 내 삶 전체가 그 가족에게서 비롯된다.”(79)
“나는 두 눈을 비볐다-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비올라도 결국 미래주의자였다. 그 애와 대화를 나누는 것, 그건 목숨을 내놓고 산길을 전속력으로 굴러 내려가는 거였다. 난 그 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늘 피로와 두려움과 흥분을 느끼며, 혹은 그 셋이 뒤섞인 채 돌아왔다.”(102)
“하지만 책들은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책들과 함께 우주가 확장되었다. 조각을 하다가 어느 결엔가 나의 행위가 외톨이의 것이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을 평생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 행위는 내 이전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련되었듯이, 내 뒤에 올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그리되리라. 망치질 하나하나는 먼 곳에서부터 왔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서로의 소리를 듣게 되리라.”(140)
“나의 복수는 20세기의 것, 나의 복수는 현대적이리라. 나는 나를 내몰았던 사람들의 식탁에 함께 앉으리라. 나는 그들과 동등한 자가 되리라. 가능하다면, 그들을 넘어서리라. 나의 복수는 그들을 살해하는 데 있지 않으리라. 그것은 그들에게 미소를 짓는 데, 오늘 그들이 내게 보여 줬던 내려다보는 듯한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 데 있으리라.”(161)
“1921년 가을의 용광로에 우연히 던져진 두 개의 사건은 거의 동시에 발생하여 내 삶을 다시 한번 파괴했다. 내가 열일곱 되던 날인 11월 7일에 무솔리니는 ras들, 그러니까 전국에서 공포가 맹위를 떨치게 만들었던 지방의 소권력자들을 집결시킬 목적으로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당했다.”(264)
“레너드 B. 윌리엄스는 비탈리아니의 피에타를 다룬 자신의 연구서 첫머리에서 비탈리아니의 피에타는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만큼 더더욱 유명하고, 솔로몬왕의 인장이나 계약의 궤나 현자의 돌처럼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신화적이고 비의적인 물건의 반열에 오르려 한다고 단언한다.”(309)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만약 전부 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도 있겠지, 미모. 네가 단 한 번도 틀리는 법 없이 처음부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넌 신인 거야. 네게 품은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신을 낳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422)
“파첼리는 나를 칭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들은 말은 열여섯 살 적과 똑같은데, 더 나아졌다는 게 전부였다. 인간은 어디 있는가? 신들의 비밀에 손끝을 갖다 대는 인간은? 그러니까, 이런 건가, 자란다는 건? 돈을 벌고, 돈을 버는 데 성공하면 약간 나아진다는 것? 나는 비올라를 비난했지만, 결국 내가 비올라보다 훨씬 더 멀리 날아간 건 아니었다.”(427)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까지 나온 비올라가 새로운 교훈을 내게 줬다-진정한 삶은 책 속에 있었다.”(441)
“나는 우뚝 선 여자다, 당신들이 일으킨 화염 한가운데에/나는 우뚝 선 여자다, 내가 보이는가, 당신들의 화형대, 처형대에 올라간 내가, 당신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내가/나는 우뚝 선 여자다.”(492)
“파시즘은 자신의 영광을 기리는 기념물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새 자기의 무덤을 건립한 것이었다.”(507)
“그곳에서는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해 유대인을 학살했다. 내가 그런 인간들을 위해 일했다. 악이 지나가도 모른 척 눈감았다. 나중에 가서야 징징거리며 자신들은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내가 더 낫다면, 그건 바로 내가 징징거리지 않았다는 것, 그 어떤 변명도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545)
“48년 동안 오빠는 두 차례 전쟁을 겪었고, 그 두 번은 다 우리네 정치인 중 소수 엘리트라는 남자들이 시작해 치르게 된 거였어. 그러니까 경험이라는 것이 그런 거라면 내가 다른 것을 시도하고 싶어 해도 그냥 가만히 있어.”(563)
“말에는 의미가 있어, 미모. 명칭을 불러 주는 건 그걸 이해한다는 거야. <바람이 부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죽음을 몰고 오는 바람인가? 파종의 바람인가? 수확하기도 전에 식물을 얼려 죽이거나 태워 죽이는 바람인가? … 트라몬타나, 시로코, 리베치오, 포넨테, 미스타랄.”(566)
“떠난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최악의 폭력, 그건 관습이지. 나 같은 여자, 똑똑한 여자, 난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해. 그런 여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관습. 그런 말을 하도 듣다 보니 그들은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고, 뭔가 비밀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어. 그 유일한 비밀이라는 건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더라. 내 오빠들, 그리고 감발레네 사람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이 보호하려고 애쓰는 건 바로 그거야.”(595)
“마술사가 보여 주고 싶은 곳을 보게 할 것. 마리아는 비올라가 아니다. 마리아로 나는 안나의 얼굴을, 피에트라달바라고 불렸던 마을에서 가장 순수한 감미로움을 담고 있는 그 표정을 활용했다. … 그들은 악마와 과학과 기타 등등을 찾아다녔지만, 사실 비올라만 존재했다. 본의 아니게, 베드로 성인도 울고 갈 정도로 나 스스로 보기 좋게 배신했고 부인했던 비올라.
그랬다, 나의 형제들. 그날 폐허 속에서, 나는 깨달았고 나는 보았다. 당신들은 내게 화해를 위한 피에타상을 주문했었다. 그리스도의 망가진 육신을 안고 눈물 흘리는 성모 마리아를. 하지만 봐라. 만약 그리스도가 고통이라면, 그렇다면 당신들에게는 아무리 고깝더라도 그리스도는 여자가 아니겠는가.”(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