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간 대피소는 어디인가요?
소설의 서두는 인간의 기원에 관한 궁금증으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내 1939년 9월 1일에 인간의 시간에 종말이 닥쳤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원과 종말 사이의 이야기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작가가 가우스틴이라고 “부르기로 한” 인물이 등장한다. 노인정신의학과 의사라고 하는 가우스틴, 시대를 뛰어넘는 시간의 부랑자, 환자들의 이야기를 훔쳐서 대비소에 넣어두는 사람, 그리고 과거에 무척 집착하는 이 인물은 작가 혹은 화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긴 하지만 어쩐지 작중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가우스틴이 작중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소설의 형식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이 소설은 작가와 작중 인물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면서 동시에 현실과 소설이 연결된 형태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흘러드는 형태”로 존재하는데, 그 자체가 시간성에 대한 유의미한 상징이기도 하다. 과거는 현재로 흘러들고, 현재는 과거가 흘러들어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설정된 소설의 세계와 작중 인물이 모두 완벽하게 일치된 셈이다.
시간의 불가역성과 과거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작가들에게 언제나 인기 있는 소재이긴 하지만 이 소설처럼 대놓고 “시간 대피소”를 설정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과거에 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취향에 따라서 갈리겠지만 소설이 주는 재미에 대한 생각은 일단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자.
재미를 밀어놓자고 한 것은 서사의 부재 때문인데, 서사가 없는 소설임에도 가독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스터리한 인물인 가우스틴과 “시간 대피소”라는 특별한 설정과 다양한 인물들의 에피소드 덕분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불가리아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있는 탓에, 작가가 의도한 것이 유머인지 풍자인지 희화화인지 냉소인지 알아차리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모든 것의 중간 어디쯤인 것 같지만, 역시나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대소설에 딱 걸맞는 설정이라는 것이다. 범속한 인물이 주인공인 데다 메타픽션이라는 형식은 현대를 말하고자 하는 소설적 형식으로 적합하다. 신화와 이데올로기라는 구시대의 산물들은 과거를 되돌아보기를 거부하지만, 현대의 소설은 과거가 현재를 구성해 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작가 자신이 화자이면서 주인공이라서 작가가 읽었거나 영향을 받았음 직한 작가들의 이름이나 책들도 툭툭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이제 더 이상 서사시의 시대가 아니라서 괴물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 혹은 노년의 시간이 괴물이 되었다는 메시지 역시 현대인의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결과로 알츠하이머 혹은 치매가 일반화된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시간 대피소가 필요하다는 말에도 쉽게 설득이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과거라는 동굴에 숨기를, 돌아가기를 원하는 때가 올 거야. 그런데 행복한 이유로 그러진 않겠지. 우리는 과거라는 방공호를 마련해야 하네. 시간 대피소 time shelter라고나 할까.”(63)
개인이 시간 대피소를 선택하는 문제는 국가가 과거의 일정한 시기를 선택하는 것까지 확장한다. 현대의 국가들이 과거의 한 때를 선택하는 투표를 하고, 각 나라마다 돌아가고 싶은 시대가 조금씩 다른 것을 보여주는 것은 재밌는 설정이다. 여러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은 하나로 통합된 국가와는 다르게 각각의 국가가 맞이한 영광의 시대가 조금씩 다를 것이라서, 각 나라가 처한 환경과 역사적 맥락에 따라서 선택한 과거의 시기를 다르게 보여주는 것에서 작가의 역사적 인식도 엿볼 수 있다.
소설은 한 인간의 삶에서 후반기에 이른 때, 기억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그 시기로까지 이어진다. 그것은 이미 각 국가의 시간 대피소를 보여준 것 덕분에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이 이제 스러져가는 빛처럼 보이고, 이제 그 빛에서 의미를 발견해야만 하는 시대라는 의미의 확장으로도 이어진다. 어떤 시간과 일정한 시대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 뒤에 오는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서 과거의 의미를 비롯해서 우리가 살았든 살지 않았든 이전 시대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추측하자면, 1968년에는 1968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누구도, 어이, 이봐, 우리가 지금 살며 경험하는 이것 말이야. 이게 역사에 길이 남을 그 위대한 68이야, 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발생한 지 오랜 뒤에야 발생한다…… 이미 생겨났다고 추정되는 어떤 일이 정말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이야기가 필요하다.”(334)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뒤로 갈수록 작가와 가우스틴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이야기 또한 모호해진다.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데다 시작과 중간과 끝이 정확할 수 없는 현대소설의 형태를 구현하고 싶었던 것은 알겠으나, 그 부분이 조금 길게 늘어져 있다.
책을 읽고 나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 있다.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과연 있는지,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정말 과거의 그 시간이 안락할 지에 대해서, 현재의 시간은 앞으로 과연 어떤 의미를 갖을지에 대해서도.
* 인상적인 문장
“결국 항상 범속한 것이 이긴다. 사소함과 그 안에 사는 미개인들이 머지않아 무거운 이데올로기의 제국들을 침략해 정복한다.”(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