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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2>

너무나 생생해서 아직도 가슴이 저미는 이야기

by 초콜릿책방지기

19세기 중반 프랑스 남성의 평균 수명은 35세 정도였다고 한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시간과 열악한 도시 환경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알코올중독 문제를 더해야만 할 것 같다. 제르베즈의 남편인 쿠포가 알코올중독으로 죽어가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만 봐도 당시 중요한 질병 혹은 사망 원인이 바로 알코올이었던 모양이다. 콜롱브 영감의 주점에 있는 독주를 생산하는 기계를 보면서 제르베즈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목로주점>의 2권을 읽기 전에는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작가가 깔아 둔 복선 덕분에 어느 정도 예상할 수는 있었지만 제르베즈에게 감정이입을 했던 독자들은 마음이 찢어지는 경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1권에서 보았던 제르베즈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 끝나고, 2권은 철저하게 몰락해 가는 과정만 보여준다. 제르베즈를 둘러싼 환경 모두 얼마나 철저히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지, 그녀가 몰락해 가는 과정에는 숨 쉴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다. 구제가 제안한 대로 함께 도망을 갔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 일은 제르베즈에게 상상 밖의 행동이다. “구제가 그녀를 거칠게 껴안고 키스를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부끄럽진 않았으리라. 참으로 별난 남자임에는 틀림없었다. 소설 속이나 상류사회에서 일어날 법한 야반도주를 제안하다니.”(41)


몰락의 일등 공신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쿠포를 꼽아야 할 것이다. 술을 마시지 않고 아내를 때리지 않는다고 했던 함석공 쿠포는 지붕에서 떨어진 사고 이후로 주저 없이 주정뱅이의 길을 걷는다.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서슴없이 아내와 딸을 때린다. 나락에 떨어진 사람은 한두 가지 문제행동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쿠포는 자신의 너그러움을 증명하기 위해 제르베즈의 전남편인 랑티에를 집으로 들이기까지 한다. 제르베즈에게는 식충이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지만, 쿠포가 그런 것까지 고려할 만한 인간이었다면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왕관은 분명히 식충이 랑티에에게 씌워줘야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알뜰하게 남김없이 제르베즈를 벗겨 먹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남자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또 하나의 원인은 제르베즈를 둘러싼 시선들이다. 쿠포의 여자 형제들인 로리외 부인과 르라 부인과 쿠포의 엄마를 비롯해서 제르베즈의 주변 인물들 모두에게서 우호적인 시선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제르베즈는 잘하고 있을 때건 잘못하고 있을 때건 시기, 질투, 멸시, 폄하의 시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녀가 넉넉하던 때 그것을 베풀면 낭비벽이 심하다고 욕하고, 가난해지면 게으르다고 욕할 뿐이다.


“그랬다, 제르베즈에게는 가혹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던 그들은 비르지니에게는 너그럽기 이를 데 없었다. 어쩌면 비르지니를 향한 그들의 호의적인 관대함은 그녀의 남편이 경관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몰랐다.”(139)


유일하게 구제만이 제르베즈에게 힘이 되어주긴 하지만, 주변의 엄격한 시선 때문에 온전히 그의 우정에 기댈 수도 없는 형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르베즈가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랑티에를 쳐내고, 쿠포를 일으켜 세우고, 자신을 추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온 우주가 그녀를 저주하는데, 그런 상황을 이겨낼 만큼 강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녀가 랄리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랄리의 상황과 그녀의 마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가진 것이 있을 때는 나누려고 하는 인간적인 마음과 자긍심, 구포 엄마를 마지막으로 보낼 때 보여줬던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제르베즈의 마음을 동요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르베즈는 고통과 용서의 화신과 같은 이 귀한 존재에게서 고통을 침묵하게 하는 법을 배우고자 노력했다. 이제 랄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침묵하는 눈빛, 체념의 빛이 가득한 커다란 검은 눈동자뿐이었다.”(170)


랄리는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국 비참하게 죽는다. 랄리의 마지막은 제르베즈의 종말을 예상하게 한다. 랄리에게 가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비자르의 학대는 제르베즈에게 가한 폭력적 삶에 대한 상징처럼 보인다. 그녀에게 꿈을 꾸게 만들었던 공동 아파트가 결국 가난의 상징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처럼, 그녀가 걸었던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동아파트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제르베즈는 자신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듯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시각에 황폐한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건물 입구가 마치 굶주린 짐승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그런데 한때 그녀는 짐승의 시체처럼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이곳 한 귀퉁이에서 사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귀가 멀어 저 벽들 뒤에서 나지막이 울리는 크나큰 절망의 음악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후로 추락이 시작되었다. 그랬다, 빈곤한 노동자들끼리 아래위로 겹겹이 살아가는 초라한 공동주택에서의 삶은 불행하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콜레라와 같은 가난에 전염되고 마는 것이다.”(308)


며칠 동안 일한 것을 받아서 ‘목로주점’에 가서 모두 마셔버리고 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쿠포와 같은 남자들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환경과 가난 때문에 굶어야 하는 여자와 아이들 다수가 존재하는 사회가 제르베즈와 같은 인물을 만들어낸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함께 사는 사회에서 적어도 굶은 사람은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작가가 19세기 중반 사회상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적어도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문학은 문학성을 통해서 인간에게 즐거움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보여줌으로써 인류의 진보에 공헌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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