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 이야기
당신에게 세상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세상은 나와 나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부르는 명칭은 굉장히 다양하지만 흔히 '나'와 '남' 또는 '아'와 '비아'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용어가 무엇이든 그 말에 담긴 의미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많은 한국어 화자에게 '남'이라는 단어는 마치 자신과 선을 긋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듯하다. 예로부터 깊은 공동체 의식을 뿌리로 하는 사회이기도 하고, '한민족', '우리'라는 단어를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문화권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다. 실제로 남이라는 말은 그런 의도이든 아니든, 듣는 사람에게는 서운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단어다. 가깝다고 여긴 상대에게 '너는 결국 내가 아닌 너일 뿐이다.'라는 말을 들은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서운함이나 속상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린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폭력이나 물질이 아닌 고상한 — 물론 완벽하거나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으나 — 언어를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잠시 감정은 내려놓고 '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너는 남이다. 이 말은 틀림없이 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애초에 서로 다르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네가 남이라는 말에 담긴 이면이다. 언어란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에게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보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더욱 탁월한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말 자체에는 '너는 내가 아니다.'라는 뜻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말에서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보통 이런 뒷말이 따라붙기 때문일 것이다. '너는 내가 아니다. 그러니 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마라. 나도 네가 어떻게 되든 신경 안 쓴다.' 하지만 이것은 맥락을 포함해야 가능한 해석이지 문장 하나를 가지고 내릴 수 있는 해석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문장만 가지고 어떤 해석을 할 수 있을까?
말했다시피 너는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너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가? 또는 나는 당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기를 원하는가? 당연히 알 수 없다. '나'라고 '남'보다 더한 것이 아니며, '남'이라고 '나'보다 못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당신이 남이라도 나는 나보다 더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 오히려 나는 당신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가치 있는 사람이고 생각하는 이유가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와 구별되는 너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나와 같았다면 나는 당신을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세상 속 내가 알지 못하고 갖지 못하며 보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 중 유일하게 내가 가진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무엇하러 온몸에, 모든 생각들에, 몸짓들에 가득 차있는 나를 더욱 가지려 하겠는가? 하지만 당신은 다르다. 당신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너'이고, 가질 수 없었던 '너'이며, 보지 못한 '너'이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에게 호기심이 동했고, 시선을 맞추었으며,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렇기에 그것은 나에게 다가와 너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이 '나'가 아닌 '남'이었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다. 왜 '나'가 아닌 것에 서운해하고 '남'인 것에 속상해하는가? 너는 '남'이기에 너에게 가장 '나'답고, 나는 '나'이기에 너에게 가장 '남'다른 것이다. 물론 당신은 내 생각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 같잖은 변명이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더욱 서운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에게 당신은 영원히 닿지 않는 '남'이고 나는 당신이 지나쳐갈 '나'인데.
이제는 클리셰적인 역설이지만, 서로 같은 것은 같아질 수 없는 법이다. 오직 서로 다른 것만이 같아질 수 있다. 어떤 상수함수에서 함수의 극한값이 바로 그 상수로 수렴한다는 사실이 놀라운가? 아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지 놀라운 것이 아니다. 3이 3인 게 놀라운가? 0이 0인 것이 놀라운가?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서로 달랐던 것들이 같아지는 것이다. 1/n이라는 양수값의 수열이 0으로 수렴하는 것, 그것이 경이로운 것이다. 비워짐이라고는 몰랐던 양수가 한없이 비워가려는 것. 결코 같아질 수 없는 것에 한없이 다가가려는 것. 이것이 삶이고 세상의 모습 아닌가? 이것은 단지 나와 남에 대한 인간관계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소망과 꿈은 이뤄지지 않았기에 소망이고 꿈이며, 여행이란 고향과 다르기에 새롭고 즐거운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당신임에 낙심하지 말고, 내가 나임에 낙심하지 말길 바란다. 부디 내가 아니기에 볼 수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당신이기에 들을 수 있는 여린 것들의 속삭임을, 당신이기에 느낄 수 있는 다가오는 봄바람의 따스함을 만끽하고 소중히 기억해 주길 바란다. 나도 나이기에 볼 수 있는 당신의 걸음들을, 생각들을, 삶을 고스란히 담아 두겠다. 그리고 언젠가 지나쳤던 당신이 되돌아왔을 때, 남 안에서 발견한 나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를 바라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