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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Jun 08. 2020

(3) 27살, 필리핀 어학연수를 가다

[검색 : 필리핀 어학연수, 필리핀, 어학연수, 단기 어학연수...]


 집에 도착해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홀린 듯 검색창에 그냥.. 호주.. 아니  '필리핀 어학연수'라고 검색했다.

아마 호주로 갈 용기는 안 나고, 그래도 영어는 해보고 싶고 해외도 나가고 싶으니.. 금액도 부담 없는 필리핀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으로 그랬던 것 같다.


  검색 후 유학원 사이트에 들어가 회원가입을 했다. 그리고는 한 시간이 지났을까. 유학원에서 전화가 왔다. 필리핀에 한 달 동안 있고 싶다고 말을 했다. 그랬더니 각 학원들 한 달치 견적을 보내드릴 테니 확인 후 다시 연락 달라고 하더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이벤트 기간인데 이번 주 말까지 까지 결제를 하면 이것저것 서비스로 드리고, 할인도 더 해드리고 블로그에 후기 적으면 또 소정의 상품을 어쩌고 저쩌고... 아무튼 뭘 많이 주겠단 안내를 받고 난 뒤 통화는 끝이 났다. 


 세상에. 유학원 상담이 이런 거였구나. 정말 쿨한데? 이렇게 전화 한 통으로 집안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거였네? 이렇게 몇 분 만에 모든 게 빨리 끝나도 되는 건가? 뭐야. 근데 나 진짜 필리핀 가나? 헐 근데 나 왜 겁먹고 있었지? 전화를 끊고 나선 내 머리 위엔 엄청 가벼운 물음표가 한참을 둥둥 떠다녔다. 사실 약간 중대한 결정을 나 혼자 내린 기분이라 약간 어른이 된듯한 우쭐함도 들었다. 근데 호주는 언제 가지? 아니야 필리핀 어학연수를 맛보기라고 생각하고 다녀오고 나서 호주 가보자.


가장 시설이 좋아 보이는 학원을 선택한 뒤, 학원비를 입금했다. 사람을 마주하기 싫어 1인실 기숙사를 선택했다. 가격은 훨씬 비쌌다. 이제 진짜 거지다! 돈 없다! 나도 몰라! 


필리핀 어학연수를 결정하는 그 순간만큼은 내 마음속에서 씩씩함이 튀어나와 나를 휘둘렀다.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우울함이 있으면 소비에 대해 과감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이거랑 관련이 있었을까?)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겁쟁이가 되어 필리핀 치안을 검색했다. 괜히 검색했다. 처참한 사진들과 영상들이 펼쳐졌다. 할 말을 잃었다. 나 그냥 못 가겠다고 하고 취소할까? 이런 거 그냥 취소하면 나 진짜 겁쟁이 중 겁쟁이가 되는 게 아닐까? 아나 뭐라도 하고 살아야 하는데... 거기 가서는 지금과 다르게 조금 활발하게 사려나? 아 그래 그냥 한 달 동안 여행 간다고 생각하자.. 라며 그렇게 나 자신을 달랬다. 


처음엔 가족들한테 어학연수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기 2주 전,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다 말을 꺼냈다. 


"나 할 말 있어"


 집안에서 한동안 어둡게 지냈던 내 입에서 나온 말에, 가족들의 표정은 정말 심각하게 굳어졌다. 살얼음판 같은 그 분위기는 마치 내가 숨겨둔 아이가 있다고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다들 무슨 할 말이냐고 묻지도 않고, 눈빛으로 어떤 심각한 이야기를 꺼낼지 숨죽여 날 쳐다보기만 했다.


"나.. 어.. 그..  다음 달.. 초에 필리핀 어학연수가.. 돈도 다 냈어. 한.. 달만 다녀올 거야."


 다들 부풀어 오른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잘 다녀오라고 말해줬다. 그렇게 난 3월, 세부로 어학연수를 한 달 다녀오게 되었다. 


[세부에 도착한 날]


 공항에서 친언니가 '비행하고 다면 당 떨어지니까 이거 먹어' 하며 초콜릿을 쥐어줬다. 민트 초코였다. 새벽 1시에 필리핀에 도착하고 앞으로 지내게 될 기숙사에 내 짐을 풀어놓았다. 긴장이 풀렸는지.. 정말 언니 말처럼 당이 떨어졌다. 언니가 준 초콜릿을 꺼내 먹었다. 그리곤 으앙 하고 큰 소리로 울었다.


이상한 감정이 섞여있었다. 설레서 그랬나? 아니면 진짜 무서워서 그런 걸까? 아니면 호주가 아니라 필리핀으로 온 나 자신이 한심해서 그랬나? 정말 모든 각도에서 모든 게 두렵고 무서웠는데 그걸 꾹 참고 있었나 보다. 첫날은 그렇게 울다가 잠이 들었다. 나름 첫 타국 생활의 시작인데 울고 앉아있다. 난 진짜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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