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의 정신없는 첫 날]
그렇게 울다가 아침이 왔다. 필리핀 사람들은 닭과 강아지를 정말 많이 키운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 일찍 닭과 멍멍이들의 울음소리에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정신이 없었다. 일단 어제 도착했을 때 안내받은 것처럼 아침 7시에 1층으로 내려가 밥을 먹고 8시에 큰 교실 안에서 다 같이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그리고 레벨 테스트를 했다.
난 내가 영어공부를 그래도 나름 했으니까~ 내 본능대로 문제를 풀면 괜찮겠지 했다.
결과는 최 하위반에서 한 단계 높은 반을 받았다.
시험을 치기 전 알 수 없는 자신감에 빠졌던 건 정말 내가 무지해서였다.
오전에는 필리핀 선생님들과 1:1로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그룹수업을 했다. 한 학원에 영어 선생님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학생들은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대만인, 베트남인 이렇게 있었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이 었지만, 회사를 퇴직하고 오신 분들도 많았다.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나이에 얽매이며 불안해하는 건 우스운 짓이었다. 역시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지 내가 나 자신을 허접한 감옥에 가두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필리핀 어학연수의 특징은 '스파르타'식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다. 학원마다 차이가 나겠지만 내가 간 학원의 스파르타 프로그램은 새벽 6시에 일어나 출석체크를 하면서 하루가 시작된다. 그리고 저녁 10시에 수업이 끝난다.
이 학원의 특징은 한국인들 한정 매일매일 영어 단어 테스트가 있었다. 영어단어를 틀리면 에이포 용지에 빽빽하게 그 단어를 외운 흔적을 보여줘야 한다. 간혹 '스파르타' 프로그램이 너무 힘들어 반을 바꾸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고작 한 달만 있는 거라 반 바꾸기엔 너무 애매해서 그냥 버티고 있었다. 솔직히 나도 너무 힘들었다. 어느 날은 내 옆에 20살 친구가 힘들다며 울먹이는데 나도 같이 울고 싶었다. 하지만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그 아이 앞에서 어른인 척해야 해서(?) 안 울었다.
해외에서도 사람 때문에 힘들 거라는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 받을 틈도 없었다. 그냥 피곤하고, 바쁘고 그랬다. 학원은 스파르타 반 / 세미스파르타 반 / 회화 반 등등 여러 가지 반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각 반 마다 외출할 수 있는 날도 달랐는데, 내가 속해있는 스파르타 반은 평일에 외출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평일엔 누구와 함께 어딜 가고 놀고 할 틈이 없었다.
주말엔 큰 계획이 없으면 그냥 쉬었다. 필리핀은 덥기 때문에 건물 내에 에어컨이 빵빵한데, 난 에어컨 바람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맨 창문과 입구 문을 모두 열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솔솔 받으며 혼자서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를 다운로드하여 봤다. 끝방이라 내 방으로 누가 지나다니지도 않았다. 1인실 방이라 이렇게 쉬는 날이면 휴가를 온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오전엔 무언갈 하지 않는 것이 불안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계획을 빡빡하게 해서 노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다 내려놓고 방에서 있었다. 여기는 요양원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뭘 해내려고 악 쓰고 있기보단 부담 없이 가볍게 있는 것도 괜찮았다.
레벨 테스트? 단어 시험? 모르겠다. 고작 한 달 있었는데 레벨이 오를리가 없다. 그냥 기분만 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