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여행서적을 빌릴까?]
그렇게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을 보내면서 나 자신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상하 관계가 있는 삶은 나에게 도저히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취업을 포기하고 어떤 일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마음이 답답했다. 지금 당장 혼자서 먹고살겠다고 사업을 차리는 것도 말도 안 됐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지내는 것 같은데 난 왜 이러지?
일을 쉬던 그 해 겨울, 엄마께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언니한테 도시락을 배달하며 지내라’라는 명령을 받았다. (언니는 몇 년간 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할 일이 없던 나는, 점심 저녁으로 언니한테 열심히 따끈한 도시락을 배달했다. 덕분에 매일같이 도서관에 출석을 하게 되었다. 언니의 점심시간보다 빨리 도서관에 도착한 날엔 도서관을 빙 돌며 이런저런 책들을 빌려 읽곤 했다.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좋았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서 그런지, 난 사람과 관계 연결수단인 '언어', '말', '대화'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소통에 대한 결핍이 생겼고, 어쩔 수 없이 간 도서관은 작가들과 간접적으로 소통을 하게 되는 최적의 공간이 되었었다.
도서관을 매일 갈 때마다 든 생각은 사람들은 정말 여행책을 꾸준히 빌린다는 것이었다. 반납함에는 늘 여행 서적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해외를 나가는 거에 대한 두려움이 없나?
해외여행이 대세인가 싶어 여행 책 몇 권을 빌려 읽었지만, 막상 내가 갈 여행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아니면 해외에 대한 큰 호기심이 없어서 몇 장 열고 닫았다 다시 닫고, 반납하기 일쑤였다.
[나는 대학생 때 왜 국내에만 있었지]
또다시 봄이 오니 마음이 풀어졌고, 지난 일의 상처들은 악몽처럼 서서히 잊혀갔다.
사실 완벽하게 나아진 건 아니었지만, 뻔하디 뻔한 봄답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은 설렘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예전처럼 회사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그나마 무기력함을 이겨내 보자는 생각에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냥 집 앞이라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용돈벌이나 하자라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다니면 사람에 대한 기피현상도 좀 사라질까 싶었다.
대기업 계열의 회사였기 때문에 겨울/여름이면 학생 인턴들의 지원을 받았고, 많은 학생들이 업체에서 인턴경험을 쌓고 있었다.
인턴 대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쩜 그렇게 부지런하고 똑똑한지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주는 혜택이란 혜택은 다 누리면서 알차게 지내는 것 같아 보였다.
그들은 교환학생, 어학연수, 워킹홀리데이, 해외 봉사 등등 20대 초반에 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했었다. 다들 이력서에 한 줄 더 적기 위해 그랬다고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면 “언니, 캐나다 연어가 진짜 맛있어요 엄청 두꺼워요.”, “언니, 제가 이맘때쯤에 오로라를 봤었거든요?”, “외국애들이랑 만났을 때 제일 웃겼던 게 뭐였냐면요” 등등.. 라며 다양한 해외 경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그 친구들은 단순 여행이 아닌 더 많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얻고 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에 반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회사에서 도망치듯 퇴사한 게 다인 나 자신이 초라하고 빈 껍데기 같이 느껴졌었다. 사실 살짝 그 해맑은 친구들에게 열등감도 생겼었다.
뒤늦게라도 무언가 다시 시작하고 싶었지만, 내 인생은 바람결에 이리 나리고 저리 날리다 보면 터지던가 정착하게 될 거라 믿었다. 그 어떤 도전도 해볼 생각이 없었다. 한마디로 내가 예상했던 사회생활을 하지 못해 무기력했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실패를 책임질 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인생이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운 것도 아니면서 가볍게 흘러가 어디론가 우연히 운명처럼 정착하여 꽃을 피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노력이 싫었다. 바람이 불면 타고 함께 흘러갈 용기도 없었다.
[외국인 손님이 많았다]
우리 동네엔 해외에서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 많은 편이었다. 외국인들이 와서 영어로 나에게 질문을 할 때면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영어를 말한 경험이 있는 학생인턴들을 찾곤 했다. 친절하게도 그 친구들은 나에게 “언니 이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해주면 돼요”라며 따로 멘트를 적어주기도 했다. 순간 자존심도 너무 상하고, 내가 이렇게 멍청했었나 자괴감도 들기도 했었다.
매일 외국인이 올 때마다 대학생 친구들을 찾으러 뛰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에게 기대기만 하려는 이 과정이 사회에서 도태되는 과정 중 하나가 될까 봐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일이 끝나면, 혼자 집에 가 '유튜브'로 서비스직 영어 멘트들을 찾아보았다. '유튜브'가 익숙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콘텐츠들이 어지럽고 정신없었다. 그래도 1년 내내 열등감에 휩싸여 있을 나 자신이 퀄리티가 낮은 콘텐츠들보다 더 싫었기에 ‘How may I help you?’부터 열심히 외워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영어를 열심히 외운날엔 외국인 손님이 오지 않았고, ‘이제 영어 공부 안 해도 되겠다’라고 마음을 먹은 날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외국인 단체 손님이 와 식은땀으로 샤워를 하곤 했다.
한 번은 “Can you speak English?”라는 외국인 손님이 건넨 말에 난 도움 안 받고 뭐라도 해보겠다고 친절한 미소와 함께 “Why?”라고 대답했고, 옆에서 "헉! 언니! 그러시면 안 돼요”하던 인턴 학생의 긴박한 표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팀장님 잘 지내세요?]
어설프게 영어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날, '하 팀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호주의 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디자인 외주가 필요하니 네가 할 수 있겠냐고. 팀장님의 요청을 거절 할리가 없는 난 당연히 승낙했고, 오래간만에 본업을 하면서 일을 핑계로 팀장님한테 호주의 생활은 어떠냐고 물어봤다.
역시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 팀장님과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 나도 떠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대화를 나누다 보니 유학원 상담 때나 해야 하는 질문을 팀장님께 넌지시 물어보게 되었다. 하 팀장님은 내가 어떤 질문을 하던 답변은 언제나 같았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에 따라 모든 게 달라. 생활비만 200만 원 들고 와서 잘 사는 사람도 있고, 1000만 원 들고 와도 벅차 하는 사람도 있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도 한국과 같이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거야. 그게 다야. 여기가 너무 좋지만, 그렇다고 너무 환상을 가질 필욘 없는 것 같아.”
그리고 늘 이런 대화를 나누면 마지막에 팀장님은 나에게 말하곤 했었다.
“호주 와~! 여기 일자리 많아. 그래도 한 번쯤은 올 만해”
봄도 아닌데 드디어 심장이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나름 영어 조금 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호주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