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말말 많은 레스케이프 호텔을 다녀와서...
레스케이프 호텔은 오픈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던 곳입니다.
관심의 이유는 첫 번째 “유통업계 금손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만든 호텔이어서”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촌스러워서”였습니다. 백화점 파미에스테이션, 데블스도어, 스타필드 등 손대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린 정용진 부회장이 만든 호텔은 과연 어떨까, 모두들 궁금해 했죠. 더구나 개성강한 부티크 호텔을 만들겠다했고, 컨셉은 무려 ‘파리’!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여행지 아닙니까.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호텔 오픈 직전 조감도가 공개됐는데, 이 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카페에 퍼지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반응은 혹평 일색이었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촌스럽다’는 댓글이 마구마구 달렸어요. (글을 쓰면서 다음카페 글을 찾아봤는데, 삭제된 상태였습니다만 호텔 공식 홈페이지에는 조감도가 그대로 있더라고요.)
뭐 어쨌든, 저의 관심을 끈 것은 후자입니다. 대체 얼마나 촌스럽기에? 오랜만에 호기심이 막 들끓었습니다. ‘이래서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건가...’ 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은 저는 지인 S, Y와 함께 호텔 탐방에 나섰습니다. 참고로 S는 OO일보에서 음식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다수의 호텔을 취재한 경험이 있고 Y는 7년차 호텔업계 종사자입니다. 이번 호텔 탐방 기회는 S가 만든 자리였습니다. 딱히 식사는 하지 않았고 물론 투숙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호텔 홍보담당자와 함께 1시간에 걸쳐 시설을 둘러보면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하여 이번 리뷰가 완벽하지는 않다는 점 미리 알려드립니다. 호텔은 먹고 자는 공간이기에, 응당 투숙과 식음업장을 이용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 리뷰를 원하신 분들은 ‘뒤로가기’ 버튼을 눌러주세요. 투숙 리뷰와 레스토랑 리뷰 포스팅은 이미 많더라고요.
제가 이번 포스팅을 통해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침대는 편했고, 음식은 맛있었다”고 단순히 말하기에 레스케이프는 너무 할 이야기가 많은 호텔입니다. 마치, 열린 결말의 영화 한편을 보고 나온 느낌이었습니다. 탐방을 마치고도 한참동안 S, Y와 함께 호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러모로 레스케이프는 ‘한국에 없던 호텔’인 것이 맞습니다. 서울 시내에 있는 거의 모든 호텔을 다 가봤지만 이렇게 긴 여운을 남기는 공간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 호텔에 묵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유는, 첫째 제 취향이 아니고 둘째 비싸서입니다. 그럼에도 호텔에 대한 리뷰를 적는 이유는 이 호텔에서 받은 느낌을 글로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서두가 너무나 길어졌네요. 자, 그럼 본격 리뷰 시작합니다.
호텔 입구에 발을 들이자마자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떠올랐습니다. 영화는 남자주인공이 특정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1920년대 파리로 타임슬립을 하는 이야기인데요. 호텔에 발을 들여놓는 동시에 서울에서 파리로 공간이동을 해버립니다.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서 무릎을 쳤던 발칙한 상상력이 호텔 공간 안에 녹여져 있다고나 할까요. 세상에, 엘리베이터의 세로 길이, 그러니까 천장이 엄청 나게 높았어요. 원목으로 마감하고 예스러운 복장을 한 파리 여인들의 스케치로 장식한 엘리베이터에서는 층수 안내 멘트도 불어로 나옵니다.
호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복도. 어둑어둑한 복도를 지나다니면서 든 생각은 이곳에서 방탈출 게임을 하면 무척 재밌겠다는 것! 원목과 거울로 장식해 벽 안 쪽에 뭐가 있는지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이쯤 되니 내가 있는 곳이 서울인지, 파리인지는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공간에 완벽하게 몰입했다는 증거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층 7층에 내렸습니다. 로비층이라고 부른 이유는 체크인 데스크가 이곳에 위치하기 때문인데요. 고풍스런 분위기의 체크인 데스크와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르 살롱’과 커피스테이션 ‘헬카페’가 7층에 있었어요. 르 살롱은 레스케이프 호텔 내 가장 조도가 밝은 곳이었습니다. ^^ 점심시간을 약간 지난 시각 르 살롱은 거의 만석이었어요. 연령층도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했습니다.
헬카페 안쪽의 도서관 공간도 인상적이었어요. 이곳은 스위트룸에 묵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그랜드 피아노와 천장까지 채워진 어마어마한 책장 그리고 안락한 소파... 한편엔 나선형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중식당 팔레드 신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26층에는 레스토랑 ‘라망시크레’와 바 ‘마크 다모르’가 위치합니다.
모두 5개의 식음업장은 국내외 전문가들에게 컨설팅을 받았고 운영진들도 최상급의 팀으로 구성됐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음식을 먹어보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하기 힘들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보면 면면이 화려합니다. 가장 관심이 가는 곳은 26층의 마크 다모르. 상세 설명은 아래의 자료로 대체할게요.
레스케이프 호텔의 주인공은 객실보다 식음업장 같았습니다. 이것에 힘을 실어준 건 김범수 총지배인. 본명보다 팻투바하라는 필명, 블로그로 더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팻투바하는 2004년부터 파인다이닝 미식 블로그를 운영해왔는데요. 2011년 정용진 부회장에 눈에 들어 신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정용진 부회장도 ‘팬’으로 만들만큼 파인다이닝에 조예가 깊었던 팻투바하는 신세계로 온 뒤 한식뷔페 올반 수제맥주 전문점 데블스도어, 파미에스테이션 등 기획에 참여했고, 거의 모든 프로젝트가 성공을 이루면서 레스케이프 호텔 총지배인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식음업 덕후가 총지배인으로 있는 호텔이니 말 다했죠.
자, 이제 객실 차례입니다. 레스케이프 호텔은 지상 25층 규모로 총 204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타입은 간략하게 스위트 객실(6개 타입), 디럭스 객실(4개 타입)로 나뉘는데, 204개 중 스위트룸이 80개로 약 40%에 달합니다.
디럭스 객실과 스위트 객실을 고루 살펴봤습니다. 하도 호텔을 구경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손님이 많이 한 층을 모델하우스처럼 상시 열어두고 투어를 진행하더라고요. 디럭스 객실을 먼저 구경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든 생각 “아... 이래서 호불호가 갈리는구나.” 개성이 너무 강합니다. 강해도 너무 강해요. 너무나 잘 정돈된 쇼룸 같아서 뭐하나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이 방에 묵는 동안 없던 정리벽, 결벽증도 생기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벽지는 소파 위 쿠션과 동일한 무늬를 하고 있고, 외부와 실내를 완벽하게 갈라놓는 묵직한 벨벳 커튼의 색은 방 한가운데 놓인 소파와 깔맞춤했습니다.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가구배치와 구성... 내가 그 방에 들어가 있다는 것 자체로 방의 완성을 깨버리는 기분이 들었어요. 옛 모습을 재현해 놓은 유럽의 어느 박물관에서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사인이 붙은 바리게이트를 넘은 느낌이랄까요. 이곳에서 과연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담스러웠습니다. (누구는 이 방에서 잠자면 가위눌릴 것 같다고까지 표현했다는...) 그리고 실내가 너무 어두운 것도 개인적으로 마이너스 요인이었습니다.
직접 가보니 알겠더라고요. 레스케이프, 특히 객실은 어떻게 해도 사진 찍기가 힘들었어요. 일반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휴대폰으로는 그 본모습을 담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빛도 모자라고 구조도 뭔가 희한해서 실제로 보는 것보다 후지게 나옵니다.
(순서에 큰 의미가 있겠냐마는) 선 식음업장, 후 객실 투어를 하고 났더니 ‘객실은 거들뿐’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습니다. 호텔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김 총지배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고요.
"일부만 즐기는 레스토랑으로 준비하지 않았다. 국내 분들이 먼저 즐기고, 입소문을 듣고 외국인이 찾을 수 있도록 기존 호텔 레스토랑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책정했다.“ [출처: 매일경제 ‘베일벗은 서울 속 프렌치 부티크…레스케이프 7월19일 오픈’]
객실을 두고 말이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인테리어 디자인. 호텔 인테리어를 담당한 사람은 ‘자크 가르시아’로 프랑스 파리의 부티크 호텔 ‘호텔 코스테’와 미국 뉴욕의 ‘노매드 호텔’ 등 부티크 호텔을 전문으로 디자인했습니다. 레스케이프 객실을 본 몇몇 호텔 전문가들은 호텔 코스테와 노매드 호텔과 너무 비슷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호텔 코스테 홈페이지를 들어가봤더니... 정말 비슷합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완전 판박이 수준이네요. 가격은 레스케이프의 약 두 배 받습니다. 뉴욕 노마드는 어떨까요. 이곳은 밝은 분위기입니다. 호텔 코스테와 비교해 좀 더 모던한 느낌이 듭니다. (자크씨... 귀신의 집 같은 취향만은 아니신가 봐요 ^^;;;)
기시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요. ‘따라한’ 호텔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자크 가르시아씨를 믿고 뭔가 독창적인 인테리어를 주문했으면 호텔 코스테와 노매드 호텔에 이어 전 세계 여행자들의 마음을 혹하게 할 부티크 호텔이 탄생했을 수 있었을 텐데요. 오리지널의 아우라가 없다는 건 많이 아쉽습니다. 어떤 호텔을 상상하고 컨셉을 잡고 만들었는지는 알겠는데, 뭔가 독창성이 없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호텔 외관이 좀 깹니다... 일반 오피스 빌딩 같은 외관을 하고 있어요. 뷰도 특출 날 게 없는 도심 한복판 시티뷰. 외관과 볼품없는 뷰는 외려 실내 공간에 몰입도를 높입니다. 밖에서 보면 안쪽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이런 효과 덕분에 호텔 전체가 스픽이지(Speakeasy)라는 느낌도 듭니다.
어쨌든, 이 호텔 지금 가장 핫한 건 맞습니다. 독특한 촬영지가 필요한 장소 캐스팅 전문가들은 물론, 화보 촬영팀, 드라마팀 등등 온갖 데서 연락이 옵니다. 트렌드세터를 자처하는 SNS 인플루언서들도 앞 다퉈 호텔에 들러 인증샷을 올리죠. 이런 관심도를 예상했던 걸까요. 레스케이프 호텔엔 멤버십이 있습니다. 호텔마다 다 가지고 있는 멤버십이 뭐 그리 특별하냐고요? 레스케이프 멤버십 가격은 연회비 500만원입니다. 500명 한정으로 발급하고요. 스위트룸 1박 이용권이 5장, 객실과 레스토랑, 바 등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300만 크레딧이 제공됩니다. 스위트룸 1박 가격이 약 50만원부터니까, 5박이면 250만원 여기에 300만 크레딧을 더하면 이것만해도 550만원 어치의 혜택인거죠. 여기에 한 달에 2번 무료로 발렛 파킹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객실 예약할 때, 식음업장 등에서 할인을 해줍니다. 뭐 이런 혜택 다 떠나서, 이 카드 한 장만 잇으면 힙스터 인증 및 돈 자랑이 가능한거죠.
사족입니다만.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호텔을 두고 부정적인 늬앙스를 담아 ‘재벌들의 놀이터’라는 표현을 쓰는데, 저는 이 표현이 조금 거슬립니다. 저에게 호텔은 환상을 파는 곳입니다. 서울 시내에 위치하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만으로 서울은 낯선 곳이 돼버리죠. 마음에 드는 호텔을 보러 해외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경험을 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돈을 들여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호텔은 구체적인 공간인 동시에 추상적인 경험입니다. 기왕 돈을 쓰는 것이라면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봤으면 합니다. 천편일률적인 것은 재미가 없으니까요.
이런 측면에서 저는 우리나라 호텔이 재벌들의 놀이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여태까지 이렇게 개성 있는 호텔을 국내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온갖 미사여구를 다 끌어다 붙여 홍보하고 마케팅을 하지만 막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별 거 없는 ‘말뿐인’ 호텔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적어도 레스케이프는 컨셉이 확실합니다. 뭐하나 허투루 쉽게 넘어가지 않았구나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공간은 정직하게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주저리주저리 길게 설명하면서 설득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직관적인 방법으로 컨셉을 풀어냈습니다. 투머치(Too Much)라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죠.
그리고 솔직히 궁금합니다. 흔히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라고 불리는 재벌들의 삶은 어떨지. 저만 그런가요? 재벌들의 인생은 항상 좋은 소재거리입니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드라마에 재벌 한명쯤은 등장하죠.
재벌들은 분명 일반 사람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문화적인 것을 누리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학습 받은 사람들의 취향은 어떨까요. 레스케이프에는 ‘정용진 호텔’ ‘정용진표 호텔’이라는 수식어가 자동으로 따라붙습니다. 신세계그룹이 선보이는 첫 독자 브랜드 호텔인데, 오죽하겠습니까. 전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내놓은 공간이 바로 레스케이프입니다. 호텔을 통해 그의 취향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식음시설은 물론 객실 인테리어와 침구, 원단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 정용진 부회장이 직접 검수한 것으로 전해졌어요. 한참 떠들고 났더니 제가 마치 정용진 부회장의 굉장한 지지자가 된 듯 한 느낌이 드는데, 전혀 그런 거 아닙니다. 오해마시길... 그의 취향이 무조건 좋다, 옳다라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취향이 드러난 공간이 반가워서 살짝 흥분한 것뿐입니다. 저는 레스케이프라는 호텔 덕분에 호텔 코스테와 노매드 호텔, 그리고 자크 가르시아라는 인물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만약 다음번에 파리나 뉴욕을 가게 된다면 두 호텔에 꼭 묵어볼 계획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레스케이프는 저에게 새로운 호텔을 소개해준 매개체인겁니다. 누군가는 호텔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어갈 것이고, 자신의 취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취향을 똑바로 아는 것은 나는 이게 좋아, 싫어라고 단순히 말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어쨌든, 이상 철저하게 개인적인 호텔 레스케이프 리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