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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썬맨 Oct 24. 2021

기차 안에서 만난 특별한 한국어 선생님

시베리아 횡단 열차(4일 차)

“가,나,다,라,마,바,사,아…”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우리 열차칸 말고 다른 칸에는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는지 아내와 구경 가는 중이었다. 3,4칸을 지나갔을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한국말. 이건 분명 한국말이었다.


“자,차,카,타,파,하”

“엇? 진짜 한국말 같은데?”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다가갔다. 근데 희한하게 그곳에 한국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눈을 닦고 다시 봐도 러시아 사람들만 앉아있었다. 분명 남자 어른 둘, 그리고 어린 소년과 소녀. 세상에 러시아인 4명이 빈 노트에 한글을 또박또박 쓰고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안녕하세요! 한국어 공부해요?”

“네 반갑습니다. 저는 세르게이입니다.”

“우와 제가 하는 말 다 알아들으시네요? 어떻게 이렇게 한국말을 잘해요.”

“네 저는 옛날에 한국에 1년 살았었습니다. 세울(서울)에서 살았어요.”


서울을 세울 이라고 발음하는 것 말고는 상당한 한국어 실력을 갖춘 세르게이. 그들과 함께 공부하는 이들은 아빠 아잣과 딸 릴리, 그리고 아들 일다르였다. 세르게이에 의하면 언어 공부가 취미인 그가 한글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잣과 아이들이 관심을 보여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한글 공부에 푹 빠진 아잣. 그는 대학교에서 행정일을 맡고 있는데 방학을 맞아 평소에 함께해주지 못한 아이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긴 여행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아이들을 위해서 더 많은걸 해주고 싶다는 착한 아빠 아잣.


“우와 그럼 세르게이가 이 공부방의 한글 선생님인 거예요?”

“아니요. 우리 선생님은 따로 있어요.”

“네? 선생님이 따로 있다고요?”

“네 저기 있어요 저기.”


세르게이와 일행들이 일제히 가르친 반대쪽을 바라보자 황급히 고개를 돌린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 그는 흰색 러닝셔츠를 입은 50대로 보이는 아저씨였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우리는 부산에서  신혼부부예요. 저는 엉뚱한 새댁 조이라고 합니다.”

“…”

“에이~ 아저씨 부끄러움이 많으신가 봐요? 러시아 사람들한테 한글도 가르쳐주고 너무 멋지세요. 혹시 어디에서 오셨어요?”


한참을 생각하던 아저씨는 조심히 대답했다.

“… 평양에서 왔소.”

“아, 평양이요?”

그는 북한에서 온 사람이었다. 본인을 최 씨(가명)라고 소개한 아저씨. 평양에서 모스크바로 건설일을 하기 위해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셨다. 아저씨 또한 한 권의 녹색 포켓북을 들고 공부를 하고 계셨다. 아내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먼저 질문을 던진다.


“아저씨 무슨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아 이게 로어회화 공부하는 거라네.”

“아 로어요? 러시아어 말이죠?”

“길티길티(그렇지 그렇지) 로시아어.”


북한말은 우리말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  같다. 러어가 아니라 로어라고 되어있다. 그래도 근함이  느껴진게 누구나 쉽게   있는 이라는 고객을 끌어당기는 표현을 쓰는 걸로 봐서 마케팅은 어느 나라에서 존재하나 보다.


아저씨는 모스크바에 건설일을 하러 가신다고 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러시아어 공부는 필수다. 책을 펼쳐보니 상황에 따른 회화 예시가 북한말 발음을 달아 번역이 되어 있었다. 우리와 다른 북한 발음이 신기한  킥킥대며 따라 읽어보는 아내. 한국어와 다른 발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생소한 부분이 있다. 아내가  웃는지를 모르는 릴리는 같은 한국사람들끼리 말하는데  저렇게 웃지?라는 표정이다. (릴리야 북한과 남한 사이에는 전쟁과 분단이란 아픈 역사가 존재한단다.)


우리는 평양 아저씨의 꿈을 물어보기로 했다.


“최 씨 아저씨, 아저씨는 꿈이 뭐예요?”

“꿈? 그게 뭐라요?”

“음… 소원, 소원이요.”

“아.. 소원~ 어서 통일이 돼야죠.”

“통일이 되면 어디에 가보고 싶으세요?”

“나는 평양에서 태어나고, 평양에서만 살아서 아는 곳은 없지만 그래도 남한에 한번 가 보고프죠.”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아저씨였지만 이내 밝은 웃음을 보이시면서 우리를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평양에 태어나 살았어도, 현재의 북한과 남한의 차이에 대해서 이해하고 계신 듯했다. 사실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참으셨던 게 아닐까.


“꼭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저씨 한국 구경하시게요.”

“그렇게만 되면 나는 좋지.”

“아저씨 우리 악수 한번 해요.”

“고마워요. 통일이 되면 평양에도 놀러 와요. 깨끗하고 좋아요. 평양은.”

“네 꼭이요.”


진짜 좋은 일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아저씨도 우리도 좀 더 자유롭게 속마음까지 오픈할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아저씨 모스크바에서 건강하시고요, 좋은 일 가득하시길 바라요.


릴리아의 그림
아잣네 가족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창밖엔 그야말로 달력 같은 풍경의 연속
북한에서 온 아저씨
로어 회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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