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자체 제작 비빔면을 해 먹다.
번쩍번쩍,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가린다. 객실 앞쪽에서부터 빛나는 이들이 걸어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치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에서 럭셔리한 F4 4인방이 걸어올 때 풍기는 아우라처럼 아내와 나의 머리에서는 빛의 아우라가 감돈다.
모두가 더위속에 감지 못해 떡진 머리로 여정을 이어가는 가운데, 지난밤 머리감기를 단행한 2인조의 모습 찰랑거리는 머리의 윤기로 빛남 그 자체였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유명인을 모시는 것처럼 어떻게 머리를 감았는지 물어본다. 아이디어가 도용당할 수 있기 때문에 사업이라면 특허를 받아야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특허가 필요 없다. 모두가 머리감기를 시도할 수 있도록 머리 감기 비법을 공유했다. 열차 규정에 어긋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모든 규정이 러시아말로 적혀있기 때문에 말이다. 원래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게 더 하고 싶은 법. 규정 여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입에 침이 마르게 아아 손에 땀이 마르게 바디랭귀지와 페트병 샤워기기를 선보이며 우리의 노하우를 공유해 주었다.
“그러니깐 페트병 아래를 요렇게 잘라가지고 물을 받아서 뚜껑을 열면…”
“와… 굿 아이디어!”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호기심이 많고 실험정신이 풍부한 아내에게 굿 아이디어라는 한마디는 최고의 칭찬이다. 찜통더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머리 감은 이야기로 사람들과 떠들어대며 오늘도 횡단 열차는 달린다.
“치이이이익, 끼-익.”
열차가 멈춰 섰다. 우리가 선 곳은 노보시비르스크 근처 어딘가. 어느덧 9288km 절반 고지를 넘어섰다. 어김없이 매점을 향한 레이스는 계속된다. 준비 시 땅. 열차가 멈춰서는 신호와 함께 누구나 할 것 없이 열차 밖으로 하차한다. 열차역에서 운영하는 매점이 전부인 역도 있지만 이따금씩 길거리 임시장터가 열리는 곳도 있다. 이번 역 또한 임시장터가 열렸다. 순식간에 라인을 맞추더니 거리 가판대가 마련된다.
“자~ 집에서 갓 구워온 신선한 과자가 여기 있어요.”
“꿀과 엿이 듬뿍 들어간 츄러스요.”
“과일과 직접 만든 라코타 치즈가 있어요. 너무 달콤하고 맛있답니다.”
서양인들이 방콕과 같은 아시아 도시를 여행하며 가장 재미있어하는 부분이 야시장 구경이라고 한다. 낮시간이지만 기차역에서 시장이 생기는 모습이 생동감이 넘치고 흥미롭다. 집에서 준비해온 정성 들인 음식과 과일들을 늘어놓고 본격적인 판매 개시. 매점으로 달려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에 제동이 붙는다.
“오빠, 우리 매점 말고 여기서 아줌마들이 만든 거 구경하고 사자. 어때?”
“그럴까?”
아내와 함께 이 여행 동안 목표로 둔 한 가지는 공정여행 하자는 것이다. 공정여행이란 생산자와 소비자가 대등한 관계를 맺는 공정무역이라는 말에서 따온 개념으로 착한여행이라고도 한다. 즐기기만 하는 여행에서 초래된 환경오염, 문명 파괴, 낭비 등을 반성하고 현지의 주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소비를 하자는 취지에서 2,000년대 들어서면서 유럽을 비롯한 영미권을 시작으로 추진되어온 운동이다.
관광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매년 10%씩 성장하지만 관광으로 얻어지는 이익의 대부분은 G7 국가에 속한 다국적 기업에 돌아가기 때문에 공정여행을 통해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이용하고, 현지에서 생산되는 음식을 구입하는 등 지역사회를 살리자는 취지도 담고 있다. [네이버지식사전]
“할머니 저희 여기 롱다리 과자 주세요.”
“아이고 할매가 맛나게 맛들었다우. 고마우이.”
츄러스 모양의 긴 대롱 과자 안에 꿀과 땅콩엿이 가득 들어있는 음식을 샀다. 계란과 토마토, 야채도 샀다. 할머니가 고마워하며 웃는 모습을 보니 뭔가 착한 일을 한 것같이 기분이 좋았다. 아마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할머니들은 또 판매 준비를 하며 기다리 시겠지. 제품이 일찍 매진돼서 빨리 퇴근하고 쉬시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어쩜 이렇게 달콤할 수가 있지? 몇 개 더 살걸 그랬어!.”
“그 봐라 우리 오빠는 꼭 내가 한번 말하면 안 듣고 뒷북을 친다니깐. 내가 더 사자고 했냐 안 했냐?”
할머니가 맛에 무슨 마술을 부리신 건지 이건 분명 잊지 못할 맛이 될 것 같다. 꿀과 땅콩엿이 섞여 과자와 함께 입안에 감도는 달콤함은 정말 최고였다.
“이게 이름이 뭔지 물어볼걸 그랬어. 그래야 다음에 올 때 사 먹거나 나중에 블로그 올릴 때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지.”
“음 그러면 우리가 이름을 정하면 어떨까? 츄러스처럼 생겼으니깐 꿀츄러스!”
“러시아 거니깐 러시아꿀츄러스?”
“길다 요즘 사람들은 길면 싫어하는 거 모르나. 그럼 러시아츄! 어때.”
“좋다 좋다 러시아츄.”
아내와의 아이디어 배틀 끝에 결국 졌다. 러시아츄로 이름 지은 과자의 풍미를 열차 안에 퍼뜨리며 우리는 또 달려간다.
사람은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그 환경에 적응을 하고, 그 뒤에는 환경을 뛰어넘으려고 한다는 말이 있다. 횡단 열차에서의 4일 동안 우리의 음식문화는 진화의 진화를 거듭한다. 첫째 날은 마트에서 사 온 도시락 라면과 빵, 둘째 날은 한국에서 가져온 전투식량과 야채 비빔밥, 셋째 날은 콘수프와 소시지 넷째 날, 바로 오늘 이번 여행 베스트 5에 당당히 이름 올릴 수 있는 열차 비빔면 이란 여행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컵라면을 먹고 난 그릇에 뜨거운 물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 매점에서 사 온 중국씩 쌀면을 불린다. 근데 이게 면을 잘못 샀는지 강아지 털이 얽힌 것처럼 막 얽혀있었었다. 그래도 먹겠다는 강한 의지 하나로 우리는 가내수공업 장신 정신을 발휘하여 한올, 한올 풀어가며 얽히고설킨 파마머리를 스트레이트로 만들어갔다. 중국에서 나온 제품인데 이게 쌀면이라기보다는 당면에 가까운 것 같다. 뜨거운 물에 불리니깐 얼쭈 당면 같은 느낌이 난다. 여기에 한국에서 공수해온 볶음 고추장을 소스로 짜넣는다. 장기 여행자에게 튜브식 휴대용 고추장은 언제나 진리이다. 이게 없으면 삶이 피폐해질 정도라 할까. 이제 제법 붉으스름해진 면을 마주 대한다. 여기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면 열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코를 벌름거릴 금상첨화의 궁합이지만, 아쉽게도 참기름은 공수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꿩 대신 닭, 참기름 대신 김이라고 아마 구운 뒤 소금간과 들기름이 발라졌을 거라 예상되는 김을 부셔서 넣었다. 김까지 넣었다는 것은 완성에 가까운 이 요리에 승부수를 걸었다는 뜻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다. 김과 고추장이 골고루 섞이도록 훌훌 비빈다. 달리는 열차인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국수에 초 집중을 한다. 먹지도 않았는데 붉게 물들어가는 저 노을 아니 국수를 바라만 봐도 군침이 돈다. 상상이나 해보았는가 시베리아 한가운데에서 그것도 열차 안에서 고추장 기운 듬뿍 담긴 비빔면이라니. 빵 종류나 도시락 컵라면, 야채 정도밖에 구할 수 없는 이곳에서 수제 비빔면이라니… 한국 고추장과 러시아 콘수프를 먹고 남은 용기와 중국 쌀면이 만났으니 이것이야 말로 음식문화를 통한 정상회담이다. 한중러 3개국 합작품이 탄생했다.
“오빠, 이거 진짜 장난 아니다 맞지. 비비기만 하는데도 군침이 계속 돈다 나.”
“맞제? 내가 고추장 맛이 잘 버무려지게 비벼줄 테니깐 쪼끔만 기다리라.”
“못 참겠다. 빨리빨리.”
이쯤에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입에 군침이 고이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지금 함께 횡단 열차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완성되었다. 후후 불어서 아내에게 건넨다.
“후르르르릅”
받아 들자마자 아내 입안 가득 면발이 흡수되어 간다. TVCM에서 너무 강력한 나머지 방안에 있는 모든 걸 흡수해버린 진공청소기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이건 그 이상이었다. 아내의 폐활량은 일순간 10배 팽창한다. 마술처럼 빠른 속도로 면은 아내 입으로 사라진다.
“여보, 이거 반칙 아니가?”
아내가 반칙으로 면을 끊지 않고 쭉쭉 빨아 당긴다. 가득 있던 비빔면이 급속도로 줄어든다. 괜찮다. 내 아내가 먹고살겠다는데 뭐 남편으로써 하하. 음악을 들을 때 무한반복이 가능하듯이 이 시간이 끝나지 않고 비빔면이 그릇에서 무한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오빠 자 얼른 먹어.”
정신없이 면을 흡입하다 순간 정신이 돌아온 아내. 나에게 힘겹게 비빔면을 건넨다. 입안에 가득 찬 군침을 삼키고 후후 불어서 한입 가득 흡입한다.
“후루 루루 루룩 쩝쩝”
이 맛은 정말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다. 군대에서 보급창고 뒤에 숨어서 몰래 끓여먹던 라면 그 맛에 버금갈만한 급이다. 100미터 달리기 하듯이 뛰어가 쉬는 시간 10분 만에 얼른 사발면 하나 매점에서 먹고 올라오던 바로 그 추억의 맛과도 같다.
우리의 여행은 그 지방의 맛있는 음식, 유명한 식당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블로그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쁜 맛집도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의 여행자금에 맞게 허리띠를 졸라매는 여행이지만 소탈함은 여행의 순간을 더욱 특별한 기억으로 만든다. 아내가 나와 함께 뜻을 해준다는 게 너무 고마울 뿐이다. 고추장과 중국 쌀면, 러시아 컵라면 그릇으로 만든 아내의 야심작이자 회심의 일격. 횡단 열차 내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후각을 올킬해버린 횡단 열차 비빔면을 아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 있게 기억하는 장면은 인생에서 힘들었던 장면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은 바로 그때 먹었던 음식이라고 한다. 아 물론 이 말은 한국에서 온 어느 신혼부부가 한 말이다. 바로 우리.
한국에 돌아가면 절대 이 맛이 안 나겠지? 바로 이때, 이 순간, 이 상황에서만 가능한 우리만의 입안 가득한 추억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다른 맛있는 것들과 비교대상에 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