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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썬맨 Oct 24. 2021

떡진 머리로 바이칼 호수에 넋을 잃었어

시베리아 횡단 열차 (3일차)

오빠, 우리 진짜 찜기에 든 만두 같다.”


러시아의 여름이 이렇게 더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거대한 거인이 열차 문에다 대고 뜨거운 입김을 훅~ 하고 불어넣은 것처럼 뜨거운 햇빛으로 달구어진 열차와, 밀폐된 내부 온기, 거기에 체온까지 더해져 기차 안은 그야말로 찜통에 가깝다. 밖에서 들어오는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커튼까지 쳤으니 내부의 열기를 밖으로 내보낼 방법이 없는 상태이다. 사람들이 다 지친 듯 파김치처럼 침대에 늘어져있다. 열차가 정거장에 도착할 때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열차 밖 그늘진 곳으로 대피하거나, 매점에서 시원한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북새통이다. 


“열차 섰다 얼른 내리자!”

“나도 갈래 나도~”


학창 시절에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기 몇 분 전부터 책상 밖으로 다리를 하나 걸치고 매점으로 향하는 출발 신호를 기다렸던 것처럼, 우리는 속도를 늦춘 열차가 완전히 멈추자마자 총알같이 달려 나간다. 이 레이스는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모두가 선수가 된다. 외국인이건 현지인이건 상관없이 모두가 어서 빨리 이 찜통에서 탈출하자는 한 가지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 통한다. 태양의 위력은 역시 대단하다. 더위 하나로 열차 내 모든 승객의 마음을 통일시켰다.


“드미트리, 이번 역은 몇 분짜리야?”

“응 이번은 20분이야.”


역에 도착할 때마다 우리는 객실담당 직원인 드미트리에게 이번 역은 몇 분짜리냐고 질문을 한다. 시베리아횡단열차는 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종착역인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역에 정차하는데 머무는 시간이 제각각이다. 손님만 내려주고 5분 만에 바로 출발하기도 하고, 기름을 넣고, 물을 보충하는 등 최대 30분 이상 머물기도 한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 출발하는지 확인하는 건 필수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달려 나간 사람들은 시원한 스프라이트 한 모금 또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자마자 선수로서의 의지를 상실하고 만다. 달리기 경기는 온데간데없고 입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기운에 황홀함을 느낀 채 식힌 몸을 이끌고 다시 열차에 오른다. 승패는 상관없다는 듯 모두가 승자가 되는 이 경기는 다음 기차역에서 다시 반복된다.


 어느덧 열차에 탄지도 3일 차가 되었다. 긴급 횡단 열차 반상회 개최에 이어 아들 자랑 손주 자랑 이야기 상자셨던 마리나 아줌마는 간밤에 한 시골마을에서 내리셨다. 며칠 사이 정이 많이 들었는데 아쉬움이 가득했다.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생각나지 않아 쓰파시바~라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안아드렸다. 연락처도 모르는 아줌마를 두 번 다시 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이별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여행 중에 누군가를 만날 때면 그동안 각자의 나라 각자의 세계에서 살던 우리가 만나 서로를 공유하고 알아간다는 즐거움이 가득하지만, 헤어질 때면 그렇게 아쉬움이 감돈다. 이별은 우리에게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마리나 아줌마를 대신해 새로운 아줌마가 탔다. 잠잘 때 공주 자태를 유지하시는 고상한 분이다. 식사 대신 커피와 비스킷을 먹으며 책을 읽으시는데 그 모습 또한 고상하시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고상한 아줌마라고 부른다. 모두가 찜통더위로 열차 밖으로 피신할 때도 아줌마는 가끔 내리지 않고 이열치열로 잠을 청하실 때가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이다. 그럴 땐 걱정이 돼서 내려서 열 좀 식히는 게 낫지 않냐고 깨운 적도 있지만 아줌마는 내리는 게 더 귀찮다는 듯 고상하게 더위와의 정면승부를 택하셨다.


 열기를 한껏 식힌 아내는 나긋나긋한지 꿈나라다. 애기들이 전해준 고무줄 팔찌를 팔에 차고 있다.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자면서 이따금씩 히죽히죽 거린다. 열차 안에서 눈꽃빙수라도 먹는 꿈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분명히 첫째 날에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뽀송뽀송했는데, 열차 탄지 3일 만에 거의다 거지꼴이 되었다. 떡지고 뭉치고 붕 뜬 머리는 기본이고, 찜통에서 삐질삐질 흘린 땀 이 베어 땀냄새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열차를 타면 모두가 겪어야 하는 일이라는 듯이 서로 마주쳐도 민망함도 없다. 어? 너도 떡졌구나? 뭐, 어쩔 수 없잖아. 하면서 다~~ 이해한다는 느낌이다. 공통된 어려움을 겪으면서 맺어진 전우애가 뜨겁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장시간의 열차가 주는 특수한 환경 안에서 만들어진 끈끈한 전우애가 어느새 생긴 것 같다. 


 우리 옆칸에 탄 러시아 대학생 커플. 첨엔 보자마자 한국인인 줄 알고 반가워서 한국말로 인사할뻔했다. 러시아인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사람과 거의 똑같은 모습이다. 


“안녕! 우리는 엉뚱한 새댁 부부라고 해. 나는 남편을 맡고 있는 썬 맨, 여기는 아내를 맡고 있는 조이야.”

“안녕 내 이름은 란, 그리고 여기 있는 내 남자 친구 이름은 리 라고해. 물론 이건 영어 이름이야.”

“하하하 나는 너네들 한국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우리랑 닮았어.”

“우리가 몽골계 러시아인이어서 그런가 봐 하하.”


함께 사진을 찍는데 오히려 내가 외국인 느낌이 나는 것 같았다. 아마 저기 저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쯤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같은 민족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영화를 찍는 이들이 있었는데, 드미트리와 2교대로 근무하는 우리 객실 칸 남자 승무원과 앞칸에 있는 여자 승무원 커플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열차가 달리는 동안 서로 떨어져 있었던 게 억울하고 아쉽기라도 하듯이 열차가 정차할 때면 자석처럼 들러붙어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이거 이거 샤방샤방하게 보기는 좋다만 그래도 근무태만 아닌가? 하하. 엉뚱 새는 얼른 달려가 이쁜 커플이라며 엄지를 올리며 따봉을 날려댄다. 나는 아내의 그런 돌발행동이 웃겨서 옆에서 배를 움켜쥐고 웃는다. 낯선 시간 속에서의 고생길이지만 여러모로 아내가 천진난만해진 것 같아서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고 덩달아 기분이 좋다. 


 아내는 1층 침대, 나는 2층 침대를 사용하는데 아내 맞은편엔 고상한 아줌마, 내 맞은편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마리아나가 타고 있다. 엄마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함께 탄 그녀는 신세대답게 연락할 데가 어쩜 그렇게 많은지 3일 동안 쉬지 않고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이따금씩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하면 수줍은 듯이 웃기만 한다. 설마 내가 웃기게 생겨서 웃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어젯밤에 천사가 한 명 탔다. 이른 아침부터 내 마음을 흔들어놓은 폭풍 귀요미 마리나. 3살 애기인데 귀여운 표정 하며 하는 행동 하나까지 사람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귀여움 덩어리이다. 사람의 인체의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내가 봤을 때 마리나는 귀여움 70%와 사랑스러움 30%로 구성된 순도 100%의 천사가 확실했다. 아빠들이 왜 딸을 낳으면 바보가 되는지 마리나를 보면서 완전히 이해가 됐다. 내가 마리나에게 너무 티 내고 넋을 잃어서일까 아내는 경쟁심이 발동한 건지 마리나의 애교를 옆에서 따라 한다. 더 귀엽다고 해야 아무 탈이 없겠지만 미안해 여보 이 순간만큼은 나도 어쩔 수가 없네. 아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수동 선풍기를 보여주자마자 마치 우주선을 처음 본 아이처럼 입을 쩍 벌리며 놀란다. 너무 귀엽다 ㅠㅠ


 첫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탑승전에 만났던 중년부부가 우리 객실 칸으로 찾아왔다. 머리가 떡진 우리에 비해서 너무나도 정상적인 그들. 알고 보니 우리는 6인실 머물렀지만 그들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4인실에 머무른다고 했다. 가격은 10만 원 정도 차이가 나는데 그만큼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편한만큼 떡진 머리 공감대나 매점 달리기 같은 이벤트는 없으니깐 엄밀히 따지면 우리 티켓이 혜택이 더 많은 걸 지도 모른다. 아내와 함께 지난 3일간 있었던 일을 신나게 나누고 있는데 깔끔한 그들 사이에 있어서인지 왠지 내 아내가 더 불쌍해 보인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마리나의 두 오빠들은 내가 만든 영상에 관심이 많다. 자기들도 유튜브 아이디가 있다며 내 아이디를 알려달라고 한다. 영상을 보며 나중에 커서 영상을 만드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귀여운 녀석들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어느새 친해져 애교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리나. 이렇게 귀여운 마리나에 하루 종일 푹 빠져있을 때쯤, 열차 내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오빠,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는데?”

“왜왜?? 무슨 일이라도 났나?”


창밖에 큰 불이라도 난 걸까. 일제히 한쪽 창가로 모여든 사람들, 대체 뭣 때문에 저리 난리일까? 아내와 나도 얼른 복도 쪽 창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왜 창문 앞에 모였을까? 왜왜? 근처에 있던 마리나 엄마에게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게다. 많은 사람들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주목적 중에 하나인 바이칼 호수. 세계 최대 규모의 호수인 바이칼을 감상하기 위해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중간지점인 이르쿠츠크에서 내린다. 그리고 바이칼 호주 주변에서 캠핑이나 펜션 등에서 황홀한 여유를 보낸 뒤 다시 모스크바로 이동하곤 한다. 아내와 나는 유럽으로 이동하는 수단으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르쿠츠크에서 내린다는 사실도 바이칼 호수라는 게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냥 7일 동안 디렉트로 모스크바까지 냅다 달릴 뿐이다. 


열차를 타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황홀함에 빠져버렸다. 창문 밖의 모습은 환상 그 자체였다. 아무런 음악이 나오지 않았는데도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면서 달려가는 열차길에 잔잔한 재즈음악이 깔린듯한 효과가 느껴졌다. 커피 한잔을 들고 물끄러미 창밖을 감상하는 사람, 비디오카메라를 들이대며 장면을 기록하는 사람,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에게 설명해주는 엄마, 백허그를 날리며 사랑을 속삭이는 중년부부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창밖에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열차를 타고 지나가는 바이칼 호수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감상할 수 있다. 그만큼 호수가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사이 해가 살짝 지면서 더욱 그 우아한 자태가 드러난다. 맑고 고요하고 넓은 호수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고, 철새들이 바위 위를 자유롭게 노닐고 캠핑족들이 호숫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즐기는 모습이 펼쳐진다. 아내의 손은 잡고 석양을 바라보며 앞으로 여러 나라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상상도 해보고, 지긋이 아내를 바라보기도 하며 한 편의 자연 다큐를 본듯한 감상에 빠져버린다. 


 바이칼 호수가 주는 최면에서 하나, 둘 깨어날 때쯤 천사 마리나는 바이칼 호수 따위 상관없다는 듯 숙면에 빠져들었고, 우리는 밥을 먹기로 했다. 아내의 요리실력은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 역 앞 마트에서 사 온 즉석밥 익히기에 도전했다. 마트에서 뜯어온 팩봉지가 한몫을 단단히 한다. 팩봉지에 뜨거운 물을 받아 그 안에 즉석밥을 넣고 익힌다. 아내가 아줌마가 되는 건 싫지만 이럴 땐 그녀의 유비무환 정신이 환경을 뛰어넘는 요리법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아줌마처럼 그런 거 좀 챙기지 말라고 잔소리하면 안 된다. 우리의 그녀들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임을 잊지 말자. 아내는 철권에도 안 나오는 10단 콤보 흔들기로 골고루 익히기에 들어간다. 믿기 어렵겠지만 갓 지은듯한 뜨끈한 밥이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2년간의 군생활이 내려준 조리 비기인 봉지라면 뽀글이를 시도했다. 봉지를 냄비 대용으로 그 안에 뜨거운 물을 받아 봉지채 먹는 라면 조리법이다. 우리의 요리를 목격한 우아한 아줌마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순대같이 생긴 소시지를 협찬해 주신다. 표정은 변화 없지만 속으로 감동을 받았나 보다. 아니면 한 입만 달라는 뜻일까?


 키친이 없는데도 아내는 열차 안에서 완벽에 가까운 식사를 차려낸다. 그 전문성을 가히 인정할만하다. “후루룩~후루룩~ 쩝쩝” 따끈한 밥과 라면 그리고 횡단 열차 3박자가 어우러진 저녁 만찬. 결국 커피와 비스킷으로 식사를 대신하던 우아한 아줌마의 심리를 자극하고 말았다. 아줌마도 못 참겠다는 듯 컵라면을 뜯으시더니 특유의 고상함을 뽐내시며 조용히 흡입하셨다. 


 그날 밤, 밑동이 잘린 1.5리터 페트병을 든 혼성 2인조가 화장실로 침투했다. 모두가 잠든 시간 다른 사람들이 하기 힘든 일을 단행하기 위해서이다. 횡단 열차 내에서는 간단한 세면은 가능하지만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광고홍보학과 출신 비상한 아이디어 브레인 부부가 아닌가. 머리 감기가 불가능한 가장 큰 원인은 세면대에 물을 받을 수가 없고 한 손으로 꼭지를 누르고 있어야지만 물이 나오기 때문인데 음료수를 먹고 특수 제작한 페트병을 활용하여 머리 감기에 성공한다. 내친김에 나는 한술 더 떠 시원한 샤워까지 감행한다. 달리는 열차 화장실엔 떡진 머리를 회복하는 한 부부의 벅벅 머리 긁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밤하늘 수놓은 별빛은 아름답기만 하다. 


90여 개의 도시를 지나가며 황홀한 광경이 펼쳐진다.
이번 매점에는 뭘 팔까? 기대하는 재미
객실 안 모습
마리나라는 아이에 푹 빠진 아내
오빠들은 축구 마니아
아이들에게 못할 짓을 했다(시선이 ㅜㅜ)
매점에서 사 먹는 아이스크림은 너무 달콤했다.
더워서 열을 식히는 사람들
어디서는 생존형 아이디어를 내는 의지의 한국인
최고의 만찬
러시아엔 한국 라면을 판다는 사실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드는 바이칼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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