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이 되었다
누군가 ‘삶은 버티는 것’이라고 했다. 스타트업을 하면서 버티는 자가 이긴다고, 버티는 거 하나는 진물 날 정도로 경험했고 또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버텨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삶은 버티는 것
단풍이 한창인 가을 어느 날이었다. 저마다 붉게 물든 가을 단풍이 고운 빛깔을 뽐내는데 나는 계절의 변화에 시선을 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사무실 창문 너머로 푸른 한강이 차갑고 거칠고 시렸다. 회사 식구들에게 회사에 남은 현금잔고를 공개했다. 딱 3개월 버틸 수 있는 금액이었다. 동시에 이들의 퇴직금을 감당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기도 했다. 결정이 필요했다. 제일 잘하는 것이 버티는 일이라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이상하게 ‘버틴다는 것’에 자부심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이들을 책임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웠다.
법인 현금잔고를 공개했다. 딱 3개월 버틸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이 때문은 아니었다. 아이는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뱃속에서 나오기 전 10달 동안 충분히 엄마를 지켜봐 왔다는 듯이 일 하는 엄마에게 더 이상은 바람이 없으리만치 순했다. 밤 9시 해가 떨어질 때면 잠들어 아침 7시 해가 뜰 무렵까지 통잠을 잤다. 가끔 새벽 수유를 했지만 말 그대로 가끔이라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게 아이는 자랐다. 아이는 똘망똘망 사랑스러운 눈으로 눈 맞춤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작고 고운 손으로 탐색하길 원했고 노래를 듣고 언어도 익히고 서서히 스스로 일어서고 싶어 했다. 아직은 스스로 할 수 없는 게 없으니 도움을 많이 필요로 했다.
어떤 엄마가 되어야지 하는 일종의 계획은 있었지만
진짜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삶의 최대 변수가 되었다.
문제는 ‘엄마가 된’ 나였다. ‘엄마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미처 몰랐다. 내가 일하다가 사무실 옆에 둔 아기침대에 가끔씩 시선을 돌려 아기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에게 사랑을 듬뿍 받아 눈 맞춤을 해주고 때가 되면 젖병을 물려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쉬는 시간에는 책도 읽어주고 노래도 불러주면 되는 줄 알았다.
평화로운 출산을 준비한다고 자연주의 출산을 했고 남편과 10개월 내내 주말이면 아이를 맞이하기 위한 다양한 배움의 시간을 가졌다. 문득 출산을 함께해줬던 의사 선생님이 이제 출산은 점에 불과하다며 아이를 잘 키우라며 토닥여주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아… 남편과 나는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낳을 것인가는 열심히 공부했는데 실제로 육아에 대해서는 조리원에서 받은 수업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를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조리원에서 나오는 즉시 깨달았으니까. 아이의 통잠은 행운이었지만, 깨어있는 나머지 시간은… 일은커녕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화장실을 편히 다녀올 수가 없었다. 내 인생 최대의 미스테이크였던 것이다! 왜, 누구도, 육아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단 말인가.
게다가 엄마가 된 회사 대표에게는 육아휴직도 뭣도…. 아무런 제도적 지원이 주어지지 않았다. 메일함에는 때때로 가족친화적인 기업이 되어야 한다며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지원 정책 안내가 왔지만 모두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조건들이었다. 그렇다고 왜 엄마가 된 대표는 제도에서 열외가 되어야 하느냐고 따져 물을 대상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삶은 내가 잠시 쉬어가고 싶다고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엄마가 갓 엄마가 된 딸을 지켜보는 마음은 아마도 이중적이었을 테다.
점심 무렵에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야? 사무실이야? 밥은? 연이어 일은 잘 되냐고 물으신다. 내 엄마니까 미주알고주알 이게 이래서 저랬다 저건 어쨌다 등등 얘기하면서도 내 엄마라서 결코 힘든 내색을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다. 내색을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들킨 것이다. 조심스레 조금 쉬었다가 다시 일하는 게 어떻냐고 하셨다가, 그래 또 쉬는 건 또 어디 쉽겠냐며 눈치를 살피신다. 누구보다 내가 어떻게 일해왔는지 묵묵히 뒷바라지 한 우리 엄마다. 딸이 수박만 한 배를 하고서도 해외출장 다닐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출산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출근해서 일하는 게 여간 안쓰러웠을까. 쉬라고 하고 싶지만 쉬면 또 그때 다시 일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배 워킹맘이기도 하다. 늘 딸이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누비며 일하는 알파걸이 되길 바라셨다. 여자도 일이 있어야 한다고, 몸소 실천하시며 여전히 일을 하고 계신 엄마였다. 엄마가 갓 엄마가 된 딸을 지켜보는 마음은 아마도 이중적이었을 테다.
목에 뜨거운 불덩이가 턱 걸려있는 거 같았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쉽지 않지만, 결단을 내려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더 이상 버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모두가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결국 서비스는 서버를 닫아두기로 했고,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는 최대한 대표 1인 체제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리고 팀원 모두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의 도움을 주고받기로 했다. 이내 텅 빈 사무실은 시베리아 벌판처럼 춥고 고요했다. 몇 번의 이사를 거쳐 넓은 사무실로 이사 왔던,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했던 짜장면과 탕수육은 추억이 되었다.
삶은 계속 흘러간다.
버티다.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지속함, 자신의 몸이 쓰러지지 않게 받지는 것을 말한다. 버티는 동안에도 삶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제 자리에 멈춰있는 것만 같았던 나 역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리라. 거친 파도가 흘러 흘러 잔잔한 물결을 만나듯이 나 역시도 파도를 타고 흘러가면 흘러간 만큼 성장해 있지 않을까. 회사는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은 아니었지만 신체적 고단함과 심적 열정으로 낳은 내 아이였다. 그리고 작은 숨결마저도 사랑스러운 내 아이가 있다. 둘 다 내 아이지만, 나는 아직 이 둘은 한꺼번에 보듬기에 조금 모자랐을 뿐. 더 이상 의미 없어진 것은 아닐 테다.
지금껏 잘 버텨왔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한걸음 새롭게 나아가 보기로 했다.
어쩌면 진짜 워킹맘의 시작은 지금부터가 진짜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