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도, 경단녀도, 전업맘도 모두 같은 이름 - 엄마
결정을 내린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다. 빠르게 수순을 밟았다. 원래 이별은 짧을수록 아픔이 덜 하다고, 서로가 결정을 내린 채로 매일 얼굴을 마주하기에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 그들은 몰라도 내 동생보다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더 많은 미래를 고민했던, 동생 같은 내 식구들이었다. 함께 일하던 팀원들 퇴직금을 지급하고,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는 마침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처럼 마무리 단계였다. 새로 들어가는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계약서에 도장만 찍는 단계이고 나 혼자서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막상 내가 인수인계받아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늘 일이 많아서 허덕이며 살았는데, 막상 정리하려고 보니 생각보다 별게 없었다. 그래서 더 서글펐다.
일은 정리하는 것은 간단했지만,
마음을 정리하는 건 그리 간단치 못했다.
일을 정리하는 것은 간단했지만, 마음을 정리하는 건 그리 간단치가 못했다. 마음이 아프다 못해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부담스러웠고 자존심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행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여행사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여행의 미래는 어떠할까 라는 세 가지 물음에 답하며 회사의 미션과 비전을 정비하고 연간계획, 3년 사업계획을 쓰고 있었던 나였다. 불과 몇 년 만에 한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 걸까. 앞이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비자발적 휴직 상태가 되었다.
본의 아니게 1인 기업이 되었다. 더 이상 한강뷰를 가진 넓은 사무실은 필요 없어졌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며칠을 집에 있었다. 그토록 육아휴직에 목말랐었는데…. 비자발적 육아휴직 상태가 되었다. 세상 끝날 것처럼 우울했다가도 또 며칠은 전업주부가 체질인가 싶을만치 행복하고 좋았다. 더 이상 다른 거 신경 쓸 여유 없이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했다. 아이와 함께 침대에서 낮잠을 자고, 눈 떠서 여유롭게 볼을 비비고 누워 한참을 셀카놀이와 동화책 읽기를 반복하며 충만한 시간을 보내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전히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이 이내 찾아와 괴롭혔다.
나는 다를 줄 알았지만
결국 여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괴로웠다.
어쩌다 거울을 보니 후줄근한 남편 목 늘어난 흰 면티를 입고 머리는 질끈 묶고 아이를 안고 있는 아줌마가 보였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게 인생은 일종의 땅따먹기 게임 같았다. 마치 게임판에 돌멩이를 던지고 원하는 땅을 하나하나 색칠해가며 얻듯이, 원하는 바가 있으면 마음의 깃발을 꽂고 사력을 다해 전진했다. 하나하나 새로운 땅을 얻을 때마다 색색깔로 색칠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35살을 코앞에 둔 지금, 내가 하던 게임판에 누가 모래를 뿌려 그간 색칠해둔 땅을 다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달려온 내게 남겨진 수식어가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 그리고 경단녀임을 깨달았다. 나는 다를 줄 알았다. 결국 여자로서의 한계를 결국 뛰어넘지 못했다는데서 오는 자괴감은 꽤나 큰 파도가 되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워킹맘, 경단녀, 전업맘
모두 같은 엄마이자 여성이다.
그렇게 나는 하루아침에 서류상 워킹맘이지만 현실은 경단녀 신세가 되었고, 동시에 전업맘이 되었다.
...... 워킹맘, 경단녀, 전업맘 - 이 세 단어 모두 같은 '엄마'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