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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손길

비와 흙이 만나서

by 김미희건이나비

요즈음 내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잔뜩 화가 난 사춘기 아이처럼 묵묵부답으로 뚱해있다. 어찌해야 하지? 그러던 중 마침 오행을 공부하는 지인이 있어 무심코 말을 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속에서 화가 나고 잠만 쏟아지네요. 왜 그럴까요?”라고 물었더니

대뜸 갱년기를 어찌 보냈는지 묻는다. 사실 나는 갱년기를 모르고 지냈다. 아마도 바쁘고 정신없이 보낸 이유도 있겠고 특별한 증상이 없어서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보냈다. 딸아이가 생리대가 요즘 왜 안 보이냐고 해서 난 그제야 완경기가 온 줄을 알았었다. 벌써 십 년도 넘은 일이다. 그렇게 얘기하니

“그럼 지금 갱년기를 겪고 있는 거네. 갱년기는 꼭 한번 치러야 하거든. 그런데 지금 나이가 몇이야?

63살이라고 하니 “그럼 7의 배수이니 변화의 시기가 맞네. 몸이 시키는 대로 해. 자고 싶음 자고, 하기 싫은 거 하지 마.” 한다.


대구엔 비가 항상 부족하다. 밭에 모종을 심었는데 비가 안 와서 며칠째 물병에 물을 담아 실어 나르면서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후에 비 소식이 있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좀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왔다. 한동안 맨발 걷기도 안 하고 있었다. 습관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천일 넘게 거의 매일 맨발로 걸었건만, 잠시 멈췄을 뿐인데 어느새 익숙했던 습관은 멀어지고 신발을 다시 벗기 어려워졌다.


마침, 빗방울이 뚝 뚝 뜬다. 반가운 마음에 신발을 벗었다. 내 산책길에는 맨발 걷는 장소가 따로 있다. 한편으로 맨발 걷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 둔 코너에서 오랜만에 맨발로 걸었다. 다행히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오랜만에 단비가 내렸다. 땅이 질어지면서 걷기 딱 좋은 상태가 되어간다. 발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흙의 촉감이 얼마나 좋은지, 이 좋은 것을 또 내가 잊고 있었구나.

신기한 것은 내 발가락은 오랫동안 구두를 신은 탓에 발가락이 서로 붙어 있었지만 맨발 걷기 덕분에 조금씩 간격이 생기고 있다. 세상에 그 좁은 사이로 흙이 들어와서 간질이는 것 같다. 진흙이 말을 건다. 기분이 좋아서 우산도 살짝 내려보았다. 얼굴에 인사하는 비는 아마도 여러 친구인가 보다. 놀라게 하는 아이도 있고 가볍게 만지는 아이도 있다. 마치 아이들 어렸을때 내 볼을 양손에 쥐고 두드리는 것처럼 옆에 그때 그 어이와 함께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이든 물질 이든 누구랑 만나 섞이는가에 따라 성질이 달라진다. 흙이 시멘트를 만나면 강한 벽돌이 되고 비와 만나니 몰캉몰캉한 감촉으로 내 발끝에 와닿는다. 물론 그 흙이 황토이면 금상첨화이고 거기에 비까지 더해지면 최고의 조건이 된다. 순간 나의 우울하던 감정은 아마도 흙 속으로 빨려 들어갔나 보다. 맨발을 걸으면 우리 몸의 정전기가 땅속으로 들어가서 건강해진다고 했는데 지금이 딱 그 기분이다.


사람들과 악수하는 할 때 순간 상대의 손에서 느끼는 그 촉감으로 어느 정도 파악이 되는 경우가 있고, 헤어지면서 포옹할 때도 느껴지는 감촉이 있고 그 감촉이 위로될 때도 있다. 말없이 어깨 한번 쳐주고 등 한번 쓸어주는 따뜻한 손의 촉감으로 기운을 얻을 때도 있다. 오늘은 내리는 빗물이 나를 일으킨다. 비는 식물을 포함한 만물을 키운다고 하지 않는가. 어느덧 나이를 먹은 나조차도 비는 다시 자라게 한다. 내가 또 한 뼘 커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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