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2002 유상철
축구팬이 즐겨 하는 게임 중 풋볼매니저, 일명 FM이라는 게임이 있다. 게이머가 구단주와 감독의 역할이 되어 전 세계 축구 리그 팀을 맡아 시즌을 운영해가는 것으로 한때 폐인을 양상했던 악명높은 게임으로 알려져 있다. 한글판이 국내에 첫 발매된 시기는 FM의 전신인 CM, 챔피언쉽 매니저 2002 K-리그라는 이름이었다. 2002 월드컵 직후 온 국민이 축빠가 되던 분위기에 휩쓸려 나는 이 게임을 구매 후 오랜 시간 즐겼다. CM을 할 때 가장 재밌는 순간은 매 경기 선발 11명 라인업을 어떤 선수로 채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이었다. 나 같은 경우 생각할 필요 없는 최고의 선수부터 일단 집어넣는다. 지금으로 치면 손흥민, 김민재 같은 선수이며 부상이 아닌 한 무조건 투입한다고 보면 된다. 다음은 포지션별로 잘하는 선수 중 당일 컨디션이 좋은 선수를 우선으로 선발한다. 그 다음 상대 팀 상성에 잘 맞는 선수를 뽑아 다시 자리를 채운다. 그렇게 구성해놓고 나면 반드시 취약한 포지션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때 나는 이 선수를 주저 없이 선택했다. 유상철은 그런 선수였다. 어떤 포지션에 갖다 놔도 제 역할을 다하는 만능 멀티플레이어. 거기다 체력과 내구성까지 좋아 부상도 쉽게 당하지 않는 선수를 감독 입장에서 안 쓸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사실 난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공으로 하는 모든 운동을 다 못하긴 했지만 축구는 유독 더 하기 싫었다. 손으로 하는 것도 어려운 판에 꼭 발까지 써 가면서 운동을 해야 하나. 체육 시간에 애들이랑 축구를 하면 일부러 공이 없는 곳으로 뛰어다녔다.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하는 게 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 공과 최대한 멀리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몸으로 직접 뛰는 걸 끔찍이 싫어했지만 스포츠 중계를 눈으로 보는 건 종목을 가리지 않고 즐기는 편이었다. 물론 축구만큼은 시청하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야구나 농구에 비해 상대적인 관심이 덜했다. 하지만 유상철이 팀에 얼마나 필요한 플레이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는 공을 피해 다니기 바쁜 나와는 대척점에 있는 선수였다.
선수 시절 그의 실력과 역할은 인정하면서도 눈길이 덜 갔던 이유는 투박해 보이는 플레이 스타일 때문이었다. 그는 동시대 스타 플레이어들에 비해 눈이 즐거운 선수는 아니었다.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는 건 특정 포지션에서 탑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반증하기도 한다. 선수 시절 울산 현대와 일본 J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오랜 시간 국가대표로 활약했는데 그를 잊을 수 없게 만든 건 두 번의 월드컵이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그는 모두 골을 넣었다. 두 번 이상의 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선수는 많지 않은데 유상철은 그중 한 명이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 벨기에전을 앞둔 대표팀은 최악의 분위기였다. 멕시코와 네덜란드에게 잇따라 패해 16강 진출은 좌절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대회 도중 차범근 감독까지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직전 네덜란드에게 충격의 5:0 패배 뒤 팬들의 분노와 실망은 극에 달했고 귀국하지 말고 뒤지라는 등 원색적인 욕들도 서슴지 않았다. 벨기에전이 열리던 날 밤 나는 형과 함께 티비 앞에 앉았다.
- 이번엔 몇 골이나 처먹을까? 네덜란드한테 5골 먹었으니 3골 정도 되지 않을까.
- 글쎄. 우리야 이미 탈락했으니 열심히 할 필요가 없지만 벨기에는 16강 진출의 사활이 걸린 경기라 죽자사자 뛸 거야. 5:0이 한 번 더 재연될지도 몰라.
- 어휴. 이번에도 김병지만 불쌍하게 됐네.
우리는 한국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고 몇 골을 먹을지에만 주목했다. 아니나 다를까 경기 시작하자마자 벨기에의 선취골이 터졌다. 아! 5:0의 서막이 다시 열리는구나.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기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갔다. 정작 죽자사자 뛰는 팀은 벨기에가 아닌 한국이었다. 그때 본 건 스포츠로서의 축구가 아닌 그야말로 혈전 그 자체. 비유적 표현으로서의 혈전이 아닌 진짜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침내 후반 하석주의 크로스를 받은 유상철이 동점 골을 만들어내며 스코어는 1:1 동점. 선수들은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육탄으로 벨기에의 파상공격을 방어하며 무승부를 지켜냈다. 형과 나는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아 기뻐할 겨를도 없었다. 그때 유상철의 골은 그 자체로 멋있는 골은 아니었지만 평생 기억될 만한 월드컵 골 중 하나로 머리에 새겨졌다.
4년 뒤 2002 한일 월드컵. 예선 첫 경기 폴란드전을 직관하기 위해 무궁화호를 타고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 어렵다는 한국 경기 예매 전쟁을 뚫고 획득한 소중한 티켓이었다. 홈에서 열리는 대회고 4년 전과 비교해 대표팀 전력은 더 강해졌지만 승리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어쨌거나 우리는 지난 월드컵 역사를 통틀어 1승도 거두지 못한 팀이었다. 패배 유전자가 장기간 쌓이다 보면 긍정의 기운을 아무리 불어넣어 본들 자신감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 전반전이 끝나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 황선홍의 선제골이 터졌고 경기 내용도 폴란드를 압도하고 있었다. 후반전 유상철의 중거리 동점골로 2:0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은 광란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올라오는 밤 기차를 타기 위해 부산역을 가는 동안 몰려나온 인파로 거리는 축제 분위기였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날 경기를 복기해보았다. 몇 번을 돌려봐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행복한 승리였다.
2021년 유상철 감독은 췌장암으로 4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선수 시절 강철 같은 체력을 가진 그였지만 암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면 떠나가는 것들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사소한 것조차 건너뛰기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나에게 유상철 감독이라는 호칭은 낯설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건 선수 유상철이니까. 늘 투지 넘치고 성실했던 유상철 선수. 당신이 만들어 낸 감동의 시간을 우리에게 선물해줘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