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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주익 언덕을 오르며

1992.바르셀로나 올림픽 황영조

by 카미유

201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메시가 뛰고 있던 F.C 바르셀로나 경기 직관, 가우디 투어, 카탈루냐 광장 등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은 매력적인 도시지만 몬주익 언덕 역시 꼭 가보고 싶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시티투어 버스에 관광객은 많지 않았고 바람도 쌀쌀했다. 몬주익 언덕에 올라 몬주익성 관람을 마친 뒤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주변은 황량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인적이 드물었는데 1992년 여름 이곳에서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다. 이윽고 대회 마지막 날 마라톤 황영조 선수가 일본의 모리시타와 함께 지옥의 몬주익 언덕을 달리며 금메달을 획득하던 순간이 자동재생되었다.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상 가장 극적이며 감동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꼽는 이들이 많다. 올림픽에서 수많은 금메달이 나왔지만 상징성만 놓고 봤을 때 이를 넘어설 만한 게 있을까? 일제 강점기 시절 손기정이 마라톤 금메달을 땄던 같은 날 8월 9일, 현지에서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 선수가 일본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따는 서사를 이길 수 있는 드라마는 없다. 그때 나는 수험생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월요일 새벽에 열린 이 역사적인 장면을 라이브로 보지는 못했다. 그날 오후 재방송 중계를 지켜보며 어제 조금만 잠을 참아볼 걸! 하는 뼈저린 후회가 밀려들었다. 결과를 알고 봤음에도 이렇게 가슴이 벅찬데 라이브로 시청했다면 감동의 파도가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안 될 정도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공교롭게 처음과 마지막 금메달을 모두 한국이 따내 한국으로 시작해 한국으로 끝난 대회였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어도 그때까지 올림픽의 꽃은 누가 뭐래도 남자 마라톤이고 보통 대회 마지막 날 열렸다. 90년대는 한국 마라톤의 전성기로 이번 올림픽에는 김재룡 김완기 황영조 트리오가 출전했다. 관록의 김재룡, 꾸준함의 김완기, 상승세의 황영조. 최근 기록으로는 황영조가 앞서지만 누가 됐든 메달을 기대해볼 만한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올림픽 무대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만큼 실력 외에 당일 컨디션과 운도 따라줘야 한다. 특히 바르셀로나 마라톤 코스는 오르막 경사가 많고 기온 역시 30도에 육박해 올림픽 역사상 최악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악명 높았다.

출발신호와 함께 백 명이 넘는 선수들이 스타디움을 빠져나갔다. 마라톤 중계라는 게 보통 그렇다. 2시간 넘도록 누가 앞서가고 누가 뒤처지고 같은 말만 반복하다 보니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엔 메달 유망주 3명이 출전하다 보니 시작부터 눈을 땔 수 없을 정도로 집중도가 높았다. 예상대로 3명 다 상위그룹을 유지하며 초반 레이스를 통과했는데 결과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누가 어디까지 살아남았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최상위 그룹에서 제일 먼저 사라진 건 맏형 김재룡이었다. 김재룡은 한때 선두까지 치고 나가며 레이스를 이끌었지만 중반 이후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고 캐스터의 멘트도 함께 사라졌다. 두 번째로 사라진 건 김완기였는데 35km 지점까지 황영조, 모리시타와 각축을 벌였다. 이때만 해도 셋이 메달을 나눠가질 것으로 보였는데 안타깝게 후반 페이스가 급격히 무너지며 화면에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황영조와 모리시타. 남은 거리상 다른 선수가 따라잡을 확률은 없었고 오로지 둘의 대결만 남아있었다. 한눈에 봐도 극한의 고통이 전달될 정도로 몬주익 언덕을 힘겹게 오른 두 선수.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기억하는 황영조의 내리막 질주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2km는 마라톤이 아닌 흡사 단거리 달리기를 보는 듯 아드레날린이 터져 나왔다. 파란 천이 깔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가장 먼저 들어온 황영조가 모리시타와의 간격을 확인 후 금메달을 확신한 듯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결승선 통과 후 곧바로 탈진해 실려 갔지만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은 그의 것이었다. 한국인에게 이날 하루만큼은 잊을 수 없는 축제의 날이었다. 한편 김재룡은 10위, 김완기는 28위로 레이스를 마쳤다. 의도치 않게 김완기는 황영조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한 셈이고 김재룡 역시 10위권에 진입했지만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황영조의 몫이 되었다.

황영조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지만 잦은 부상 속에 선수 생활은 길지 않았고 국민 마라토너의 타이틀은 이봉주에게 넘어갔다. 이후 사생활 논란과 각종 구설수에 올라 이미지가 추락했지만 선수 황영조의 커리어는 나무랄 데 없었다. 혹자들은 그를 두고 게으른 천재가 아니냐는 시선도 있지만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도 올림픽 금메달은 결코 노력 없이 주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른 은퇴 역시 만성적 족저근막염 때문이지 사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2년 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아예 일본 현지에서 일본 선수를 이기고 획득했다. 이는 올림픽 금메달로 목표 의식이 상실될 법한 상황에서 따낸 거라 더욱 의미가 깊다.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달리기는 체격이 작은 동양 선수가 특별히 불리하지 않은 종목이라 과거에는 아시아의 정상급 마라토너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천년대에 접어들면서 아프리카 선수들이 우승을 독식하면서 아시아 선수들의 전성기는 사실상 끝이 났다. 한국도 생활 스포츠로서의 마라톤 저변은 넓어졌지만 엘리트 선수가 되려는 이들은 많지 않다. 마라톤 풀코스를 직접 달려본 이들은 42.195km가 얼마나 길고 극한의 고통이 수반되는지 절감할 것이다. 몇년전 하프코스를 2시간 30분 동안 뛰어본 적이 있는데 흡사 온몸이 녹아내리는 체험을 맛본 뒤 다시는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인내의 시간에 비해 보상이 적고 국가대표가 된들 과거와 같은 취급을 받지 못하니 재능있는 이들이 인기 스포츠로 빠지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마라톤의 감동을 지금 세대가 가질 수 없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국뽕과 내셔널리즘 같은 말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황영조의 금메달만한 감동이 앞으로 다시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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