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96 시애틀 슈퍼소닉스
NBA에 처음 호기심을 갖게 된 건 93년 시카고 : 피닉스의 파이널이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과 악동 찰스 바클리의 대결로 화제가 됐는데 국내에서는 중계를 볼 길이 없어 기사와 뉴스로만 접했다. 짧은 하이라이트 영상만 봤는데도 NBA는 차원이 다른 신세계였다. 근육질 흑인들의 고무공 같은 탄력과 현란한 드리블 폭발적인 덩크까지.... 그간 즐겨보던 국내 농구대잔치는 애들 놀이터 같았다.
이듬해 국내 유일의 NBA 잡지 ‘루키’를 구독하며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AFKN에서 NBA 중계가 있는 날은 밤을 꼬박 새며 경기를 보았고 "NBA on NBC" BGM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시절이었다. 조던이 은퇴했지만 여전히 스타들은 즐비했고 팀마다 다양한 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역동적인 영건 듀오 페니와 샤크의 올랜도 매직, 3점 슈터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 명센터 올라주원이 이끄는 휴스턴 로케츠, 매력적인 단신 포스트 존슨과 모닝의 샬럿 호네츠, 영혼의 픽앤롤 콤비 스탁턴과 말론의 유타 재즈 등 시선을 사로잡을 요소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풍성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유심히 봤던 팀은 시애틀 슈퍼소닉스였다. 93/94시즌에서 63승의 최고 승률을 기록했음에도 무톰보가 이끄는 최하위 8번 시드 덴버 너게츠에게 패해 탈락한 굴욕의 역사 때문이었다. 당시 시애틀은 짐승같은 운동능력의 레인 맨(Reign Man) 숀 캠프와 악바리 수비수 글러브(Glove) 게리 페이튼 두 젊은 스타가 이끌고 있었다.
NBA 사랑에 한 번 더 불을 지피게 된 계기는 EA에서 출시한 NBA 라이브 95 게임이었다. 실제 NBA 선수와 팀이 그대로 반영된 이 게임은 혁신적인 그래픽과 조작성으로 수많은 농구 팬들을 사로잡았다. 얼마나 플레이를 많이 했으면 NBA 모든 팀의 선수 이름과 스탯을 다 외울 지경이었다. 당연히 녹색 유니폼의 시애틀 슈퍼소닉스는 원픽이었다. 한편 94/95 시즌 도중 마이클 조던의 복귀라는 빅뉴스가 발표되면서 팬들은 열광했다. 농구 황제의 귀환은 NBA 인기 판도를 뒤흔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즈음 국내에서도 NBA를 볼 수 있는 채널이 생겼다. 비록 심야에 방영되는 녹화 중계였지만 한국말 중계와 해설로 NBA를 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시즌 도중 복귀한 조던의 플레이는 여전했지만 긴 공백기 탓에 몸 상태가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해 챔피언은 휴스턴이 차지했고 시카고는 이듬해 역대 최고의 리바운더 데니스 로드맨을 영입하며 강력한 우승 후보로 부상했다. 95/96 시즌 시카고는 시작부터 패배를 잊은 채 승리를 이어나갔다. 조던은 전성기와 버금가는 활약을 펼쳤고 피펜과 로드맨으로 이어지는 삼각편대의 위력은 공수에서 타 팀을 압도했다. 한편 시애틀 역시 서부의 강자로 군림하며 차근차근 승수를 쌓아나갔다. 당시 국내에 가장 팬이 많았던 팀은 시카고 불스와 올랜도 매직이었는데 SBS에서도 이 두 팀의 경기를 집중적으로 편성하였다. 시애틀은 서부에서 가장 높은 승률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인기는 이에 미치지 못했다. 정규시즌에서 시카고는 72승 10패라는 NBA 역사상 최고 승률을 기록했고 시애틀 역시 64승 18패로 역대 팀 최고 승률을 달성했다.
마침내 동서부의 최강자 두 팀은 우승을 위한 플레이오프의 대장정에 올랐다. 예상대로 시카고는 플레이오프에서도 승승장구했다. 뉴욕에게 당한 1패를 제외하면 파이널까지 11승1패라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였다. 특히 사실상의 파이널이라 불린 올랜도 매직을 4:0으로 압승하며 조던은 복귀 첫해 패배를 깔끔하게 설욕했다. 반면 시애틀의 여정은 시카고만큼 순탄하지 않았다. 8번 시드 새크라멘토를 3:1로 이기고 올라주원이 이끄는 디펜딩 챔피언 휴스턴을 스윕할 때까지는 비교적 잘 풀려 나갔다. 하지만 유타에게 최종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파이널 무대에 올랐다.
기본 전력도 시카고의 우세였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한 시카고와 달리 력적으로 불리한 시애틀이라 대다수 전문가들은 시카고의 손쉬운 우승을 점쳤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단순한 팬심을 떠나 그해 시애틀은 역대 최강의 팀 시카고와 충분히 겨룰만한 잠재력이 있었다. 정규시즌 시카고와 시애틀의 맞대결은 1승1패. 비록 로드맨이 빠진 상태의 승리였지만 어쨌든 균형을 맞추었고 양쪽 다 센터가 약한 스몰 라인업이라 유일한 취약 포지션인 센터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무엇보다 플레이오프에서 캠프와 페이튼의 컨디션은 상승세였고 휴스턴과 유타를 연달아 격파한 자신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시카고의 홈에서 열린 1,2차전에서 시애틀은 조던의 득점을 30점 이하로 제어했음에도 시카고의 압박 수비를 뚫지 못해 두 경기 모두 100점을 넘기지 못하고 패배했다. 캠프는 조던을 능가하는 맹활약을 펼쳤지만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시애틀의 홈에서 열린 3차전에서 조던은 마침내 득점 봉인이 풀리며 36점을 퍼부었고 22점 차 대패를 당한 시애틀에게 회생 가능성은 전무해 보였다. 시카고와 조던은 진정 통곡의 벽이란 말인가! 64승을 올리고도 무기력한 패배를 지켜봐야 하는 운명이라니. 이제 남은 건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적지에서 시카고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애틀은 이대로 끝날 수 없다는 듯 반격을 시작했다. 캠프의 득점력은 꾸준했고 페이튼은 조던을 꽁꽁 묶으며 시카고의 득점을 80점대로 봉쇄했다. 4,5차전을 연속으로 승리한 시애틀은 시리즈를 2승3패로 맞춘 뒤 마지막 시카고 원정을 떠났다. 양 팀의 수비가 워낙 견고해 시리즈 내내 저득점 경기가 속출했는데 6차전에도 득점 가뭄 현상은 이어졌다. 승리의 여신은 끝내 시카고의 손을 잡았고 조던은 복귀 후 첫 우승 트로피를 들오올렸다. 6차전의 패배는 충분히 예견되어 있었다. 시애틀의 기세가 아무리 높아도 72승의 시카고가 3연패를 하는 그림은 나조차도 그려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시애틀은 역사상 최강이라 불리는 시카고를 상대로 졌잘싸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선전했다. 여느 해였으면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음에도 운이 나빴다. 훗날 골든 스테이트가 시카고의 72승 기록을 깼지만 둘 중 골든 스테이트의 손을 들어주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95/96 시카고는 완벽에 가까운 팀이었다.
시애틀은 07/08 시즌 후 오클라호마로 연고지가 넘어갈 때까지 한 번도 파이널 무대에 서지 못했다. 간판스타 캠프는 이적 후 자기관리 실패로 초라한 말년을 보냈고 페이튼 역시 우승 반지를 끼지 못한 채 은퇴했다. 95/96 파이널에서 조던의 평균 득점은 고작(?) 27점에 그쳤다. 본인의 파이널 최저득점이자 큰 경기에 유독 강했던 그이기에 일종의 치욕이었고 이는 페이튼의 악착같은 수비 때문이었다. 캠프는 평균 23.3득점 10리바운드로 마이클 조던을 능가하는 스탯을 올렸고 만일 시애틀이 우승했다면 파이널 MVP에 등극했을 것이다. 이들은 빼어난 활약만큼이나 시각적인 재미도 컸던 선수였다. 다양한 각도와 자세에서 내리꽂는 캠프의 호쾌한 슬램덩크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페이튼의 수비는 시애틀의 팬이라면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시애틀 팬들은 팀명에 걸맞게 초음속으로 날던 95/96 시즌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팀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두 슈퍼스타도 은퇴했지만 시카고 불스와 맞장 뜬 시애틀 슈퍼소닉스는 지금도 나에겐 NBA의 상징이자 심장을 뛰게 만든 팀으로 꿋꿋이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