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도쿄 올림픽 김연경
2021년 8월 4일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 8강전 한국 : 터키. 김연경의 스파이크가 상대 코트에 꽂히며 4강 진출을 확정 짓는 순간 종일 침대에서 뒹굴며 휴가를 보내던 나는 반사적으로 야~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세트스코어 3:2 승리. 3게임 연속 풀세트 승리였다. 예상치 못했던 승리인지라 흥분 강도는 최고조로 치달았다. 승리한 한국 선수와 패배한 터키 선수 모두 울음이 터졌다. 하지만 같은 울음이라도 그 농도 차는 극명히 대비되었다. 사실 여자배구의 올림픽 4강 진출이 처음은 아니다.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 동메달을 땄고 2012 런던 올림픽 때도 4강 진출의 이력이 있다. 다만 도쿄 올림픽 4강은 그 속에 더 특별한 사연이 담겨있어 감동이 한층 배가되었다.
런던 올림픽에서 여자배구는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브라질 이탈리아 같은 강팀들을 이기며 선전했다. 그 중심에는 최전성기 시절을 보내고 있던 세계적인 공격수 김연경이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원맨팀의 한계는 4강까지였고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의 능력치는 여전히 큰 격차가 있었다. 그때 김연경 같은 선수가 한 명만 더 있었다면 금메달까지 노려볼 정도로 김연경은 독보적이었다. 4년 뒤 리우 올림픽 때도 김연경은 맹활약했지만 혼자 힘으로 승리를 만들어낼 순 없었고 8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다시 5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김연경도 우리 나이로 34살이 되었다. 리시브와 코트 장악력은 여전히 탑이었지만 스파이크 위력과 반응속도는 전성기에 비해 떨어졌고 체력 역시 과거처럼 혼자 몰빵 공격을 감당하기엔 버거웠다.
김연경의 후계자로 많은 이들은 흥국생명 이재영을 꼽았다. 이재영은 178cm의 단신이지만 김연경이 떠난 국내 무대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용병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나이도 1996년생 스물다섯으로 한창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 역시 이재영의 팬으로 흥국생명 경기의 직관을 가기도 했다. 이재영의 쌍둥이 동생 이다영도 국가대표 세터로 기량이 성장 중이었고 둘은 한국 여자배구의 미래를 이끌 소중한 재목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해 쌍둥이 자매는 학폭 논란으로 팬들에게 큰 상처를 안기고 사라졌다. 올림픽을 앞둔 대표팀은 세컨드 공격수와 주전 세터를 졸지에 잃어버렸고 직전 열린 VNL 대회에서 16개국 중 15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기록한 채 돌아왔다.
VNL 참패 이후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김연경도 한물갔다는 소리가 흘러나오며 기대감은 낮아졌다. 일차 목표는 8강이지만 현실적으로 조별 예선 통과도 힘들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같은 조에 속한 5개국 중 케냐를 제외하면 1승을 자신할 수 있는 팀은 없었다. 주장 김연경은 이번에 꼭 메달을 따겠다고 했지만 어차피 의례적 멘트로 받아들였다. 첫 경기에서 강호 브라질에 3대0 완패를 당한 뒤 최약체 케냐에게 승리했지만 여기까지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도미니카와 일본을 연달아 풀세트 접전 끝에 이기며 8강 진출을 확정 짓자 저물었던 기대가 되살아났다. 그래도 설마하니 4강은 힘들겠지. 8강에 오른 팀 중 우리보다 랭킹이 낮은 팀은 전무했고 8강 상대 역시 세계랭킹 4위이자 최고의 프로리그를 보유한 터키였다. 하지만 터키마저 풀세트 접전 끝에 승리하며 런던 올림픽 이후 다시 4강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했다.
런던의 4강보다 더 고무적인 건 여러 악재를 딛고서 올라섰다는 점이었다. 특히 김연경의 뒤를 받힌 박정아의 스토리는 꽤나 뭉쿨하다. 처음으로 출전한 리우 올림픽에서 박정아는 장신 공격수라는 이유로 대표팀에서 중용되었지만 채 여물지 않은 기량을 가진 선수였다. 중요한 고비마다 번번이 공격이 막히면서 승부의 흐름을 끊어놓는 통에 패배의 원흉으로 취급받았다. 대회가 끝난 뒤 온갖 악플에 시달렸고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때문인지 비호감도 급속도로 쌓였다. 이후 국내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하면서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리우의 기억 때문인지 그래봐야 국내용이라는 불신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도쿄에서의 박정아는 달랐다. 클러치 박이라는 별명답게 위기 때마다 결정적인 공격을 성공시키며 팀을 구해냈다. 평소 잘 웃지 않는 박정아의 환한 미소를 도쿄에서는 여러 번 목격할 수 있었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로 날아오르는 순간이었다.
34살 에이스 김연경은 대회 내내 휴식 없이 거의 풀세트를 뛰었다. 김연경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수들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큰 벽이 가로막을 때마다 답은 김연경이었고 경기 외적으로도 리더의 역할을 다했다. 이런 선수가 앞으로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혹여 배구를 더 잘하는 선수가 나올 수는 있어도 김연경처럼 실력뿐 아니라 배짱과 리더쉽을 모두 갖춘 선수를 보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런던 때의 김연경이 기량은 더 뛰어났을지 몰라도 나는 도쿄의 김연경이 더 멋지고 대단해 보였다.
도쿄 올림픽에서 더 이상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한국은 메달 획득에 또 실패하였다. 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모두 누렸음에도 올림픽 메달이 없는 한을 끝내 풀지 못한 배구여제는 이제 곧 은퇴를 앞두고 있다. 김연경 없는 대표팀이 언제 다시 올림픽 4강에 갈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현 여자배구의 현실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김연경은 그저 한 명의 스타가 아닌 대한민국 여자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누구도 그 자리를 메우는 건 불가능하다. 현재 V리그 챔피언 결정전이 진행 중인데 김연경을 코트에서 볼 수 있는 게 어쩌면 내일이 마지막일 수 있다. 비록 올림픽 메달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소속팀 우승으로 라스트 댄스를 화려하게 장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