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복싱 박시헌
1988년 가을 10월2일 일요일. 우리 가족은 아침부터 티비 앞에 모여 앉아 올림픽 중계를 보고 있었다. 이날은 88 서울 올림픽 마지막 날로 체급별 복싱 경기 결승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선수인 김광선, 박시헌이 결승에 올랐고 중학생인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 모두 이들의 금메달을 간절히 기원하며 응원의 마음을 보냈다. 오전 일찍 시작된 플라이급에서 예상대로 김광선은 동독 선수를 맞아 시종 우월한 경기를 펼치며 금메달을 따냈다. 얼마 뒤 라이트 미들급의 박시헌이 링에 올랐고 상대 선수는 미국 선수 로이 존스 주니어. 1라운드부터 로이 존스 주니어의 주먹이 박시헌의 안면에 꽂혔고 시합은 로이 존스의 우세로 끝이 났다. 한국의 12번째 금메달을 기대했던 우리는 아쉽긴 해도 어쩔 수 없는 시합이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고 채점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심판은 박시헌의 손을 번쩍 들었다. 박시헌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어리벙벙한 얼굴이었고 관중석에서는 환호와 웅성거림이 뒤섞인 진풍경이 펼쳐졌다. 우리 가족은 말도 안 되는 편파판정이라는 쪽과 어쨌든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땄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반응이 반반이었다. 어쨌든 로이 존스가 더 잘했다는 것만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자마자 아이들은 이 시합에 대한 논쟁이 펼쳐졌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박시헌이 금메달을 반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아무리 우리나라 선수지만 금메달을 빼앗긴 로이 존스 주니어가 불쌍하다고 했다. 심판이 우리나라 홈이라 봐준 것 같다는 말도 많았다. 복싱에서 논란이 되는 판정은 그간에도 많이 봐왔지만 막상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니 더 불쾌했다. 그깟 복싱 경기가 뭐 대수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시절 올림픽의 의미와 복싱의 영향력을 고려해본다면 단순한 문제로 치부할 수 없었다. 복싱은 국민 스포츠였고 주말이면 온 가족이 티비 앞에 모여 세계 챔피언 유명우, 장정구의 중계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마이크 타이슨, 슈거레이 레너드 같은 해외 유명 복서 경기의 시청률 역시 엄청나게 높았다.
다음날 10월3일 신문에는 이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 물의 빚은 박시헌 판정승. 박의 금메달은 공교롭게 마지막 날 마지막 금이 돼 더욱 개운찮은 뒷맛을 남긴 게 사실이다. 박에 앞서 얻어낸 11개의 금메달이 우리 선수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임은 두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조선일보)
- 한국 먹칠한 억지금메달. 박시헌의 금메달은 한국이 따낸 11개 금메달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을 한 ‘먹 메달’이었다. (한겨레신문)
박시헌의 기사는 김광선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화끈한 금선물이라는 타이틀로 링 위에서 두 손을 번쩍 쳐든 김광선의 사진 옆에 박시헌의 기사가 실렸다.
- 이 사건은 복싱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박시헌은 부심 세 명의 선물로 금메달을 땄다 (이탈리아 취재기자 폴로리도)
박시헌 대 로이 존스 주니어의 시합은 훗날 AFP가 소개한 역대 올림픽 5대 오심에 들어갈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사실 이 시합이 가지는 의미는 좀 특별했다. 박시헌과 로이 존스 주니어의 경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의 비뚤어진 스포츠 이데올로기가 관여되었다는 합리적 의심이 지배적이었다. 대회 막판까지 동독과 미국은 2위를 놓고 치열한 금메달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미국의 2위를 막기 위해 박시헌에게 금메달을 안겼다는 것이다. 로이 존스 주니어는 IOC에 제소했으나 IOC는 이를 기각하고 박시헌의 금메달을 인정했다. 물론 동독 측도 심판 매수나 로비 의혹을 부인했다.
논란의 시합 이후 박시헌은 언론과 국민의 비난 속에 도망치듯 강제 은퇴를 했다. 이후 그를 잊고 있다 2016년 리우 올림픽 복싱대표팀 감독 이름에서 박시헌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아래 박시헌의 인터뷰들은 히스토리 후 방송에서 따옴 )
“올림픽을 보름 앞두고 최상의 컨디션과 최고의 몸 상태까지 만들었어요. 그런데 스파링 과정에서 상대방의 머리를 잘못 때려 오른손 세 개의 뼈 중에서 가운데 뼈가 완전히 부러졌어요. 지도자 선생님이나 누가 알게 되면 올림픽에 출전할 수가 없어요. 의사 선생님이 출전하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울면서 빌었어요. 올림픽만 뛰게 해달라고.”
박시헌은 같은 날 금메달을 딴 플라이급의 김광선만큼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아시아에서는 최강자였지만 서양 선수들이 우세한 중량급이라 금메달까지 기대하지 않았다. 박시헌이 손에 심각한 부상을 안고 뛰었다는 사실은 당시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고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다. 그는 고통을 참아가며 결승까지 올랐고 결승에서 심판이 공정하게 판정했다면 자랑스러운 은메달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심판이 박시헌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 그는 한순간에 부끄러운 금메달리스트가 되어버린 것이다. 올림픽이 끝난 뒤 언론과 방송은 마치 박시헌 본인이 이 사태를 주도하기라도 한 듯 과한 비난을 퍼부었다.
“선수들은 자신이 시합을 하면 이겼는지 졌는지 알 수 있어요. 저는 졌다고 생각했어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지막 판정을 내릴 때 제 손이 올라갔어요. 저도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이건 아니다 싶더라구요.”
인터넷에서 그날 경기를 다시 찾아보았다. 당시 기억으로는 박시헌이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것 같았는데 다시 보니 그렇게까지 기울어진 시합은 아니었다. 2회전에 당한 스탠딩다운도 석연찮은 데가 있었고 3라운드는 유효타도 제법 날리며 거의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물론 아무리 호의적으로 봐도 박시헌이 이긴 시합은 아니었다. 그래도 박시헌이 부상 당한 몸으로 훗날 복싱의 레전드가 된 로이 존스 주니어에 맞서 잘 싸웠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로이 존스 주니어와 박시헌의 인생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로이 존스 주니어는 올림픽 이후 곧바로 프로에 데뷔해 4체급 세계 챔피언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며 슈퍼스타가 되었다. 반면 박시헌은 강제은퇴 후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극도의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 로이 존스 주니어의 성공은 미국인들에게 빼앗긴 금메달의 시련을 딛고 일어난 승리의 드라마였다. 올림픽 결승전에서 로이 존스 주니어는 피해자였지만 박시헌은 그 시합 이후 삶 자체가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로 정말 악몽이었어요. 비판도 많았고 ‘금메달 반납해라’. 정말 그때의 충동은 자살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차라리 내 손이 올라가지 않았으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고 더 기쁜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올림픽 이후로 악몽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나도 그때 박시헌을 욕했다. 편파판정을 비판하는 건 윤리적인 일이라 여겼다. 과정이 어떻든 당사자인 박시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괴로우면 스스로 금메달을 반납해. 하지만 과연 그 상황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지금보다 훨씬 국가대표의 종속성이 컸던 현실에서 당신은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적어도 박시헌은 자신이 졌다는 건 시인했다. 그는 패배를 인정했고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찡합니다. 국민들도 그렇고 복싱을 사랑하는 사람 체육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잊었으면 참 좋겠어요. 아직까지 마음이 아파요.”
보통의 금메달리스트라면 화려했던 시절을 사람들이 기억하길 바라고 잊히는 걸 아쉬워한다. 하지만 박시헌은 반대로 잊어주길 바랐고 결과적으로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젊은 세대는 박시헌이 누군지 모를 것이고 과거 사람들도 복싱 인기의 쇠락과 함께 그를 지워버렸다. 그의 인생은 어떻게 보면 충분히 성공한 인생일 수 있다. 그 어렵다는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땄고 훗날 복싱 대표팀 감독도 해봤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가했던 부당한 행위들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2년 전 박시헌을 모티브로 한 영화가 나온 적이 있다. 흥행에서 재미를 보진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그를 떠올릴 수 있어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