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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Aug 24. 2023

스미마셍~ 아리가또~

 십 수 년 전 혼자 떠난 일본여행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비행기가 연착되면서 간사이공항 마지막 전철을 놓쳤고 겨우 탄 심야버스가 오사카의 출입문인 난바 역에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새벽 1시를 지나고 있었다. 낮에는 활기가 넘쳤을 법한 이곳도 인적이 끊기고 도로에 차들도 드문드문 지나갔다. 출력해둔 지도로 숙소 호텔을 찾아봤지만 밤이라 그런지 도통 찾을 수 없었다. 난바 역 주변만 30분 째 헤매고 다녔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약도에 가까운 허술한 지도를 챙겨왔다는 뒤늦은 후회가 찾아들었다.

    

 11월의 오사카 기온은 서울보다 5도 이상 높지만 밤공기는 차가왔고 퇴근 후 서둘러 오느라 몸은 벌써 지쳐있었다. 결국 몇 안 되는 행인 중 인상 좋아 보이는 사람을 붙잡아 지도가 인쇄된 투명홀더를 내밀었다. 스미마셍~ 누가 그러길 일본 여행은 스미마셍과 아리가또만 잘하면 된다고 들었다. 푸근한 마스크의 중년여성과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남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도와주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끝내 미안하다는 표정만 남긴 채 가버렸다. 그때 갑자기 젊은 남자 세 명이 옆에 오더니 들고 있는 걸 보여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투명홀더를 건네주자 이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전혀 몰라 알아듣지 못해도 대충 상황을 보니 역시나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이들이 빨리 지도를 돌려주고 제 갈 길을 가길 바랐다. 이유인즉슨 세 명의 심상치 않은 외양 때문이었다.


 처음 지도를 달라고 한 놈은 미용실에서 몇 시간을 세워야 저런 게 가능할까 싶은 오색찬란한 빗자루 머리를 하고 있었다. 옆에 놈은 더 범상치 않았는데 코뚜레를 한 것처럼 콧구멍 사이에 큼직한 금색 피어싱 링을 박았다. 무릎 밑까지 내려온 검정색 자켓에는 큼지막한 한자가 새겨져 마치 특공복을 연상시켰다. 나머지 한 놈은 겉으로는 무난해 보이지만 덩치가 만만찮아 절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 날씨에 반팔 티를 입고 돌아다니는 모양새도 그렇고 옷 속에 용 문신 몇 개가 감춰져 있을 것 같은 포스였다. 빗자루, 코뚜레, 덩어리. 나는 문득 저들과 닮은 만화 속 캐릭터가 누구일까를 떠올려보았다. 한눈에 봐도 학원액션물에 나올법한 악당 캐릭터들을 빼다 박은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만 웃음기는 곧바로 공포심으로 전환되었다. 이곳은 낯선 땅 오사카의 밤거리였다.

     

 셋은 지도를 돌려줄 생각 따윈 없는 듯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었다. 투명홀더 안에는 지도뿐만 아니라 여행 일정과 예약 바우처도 들어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불길한 상상이 포개져 들어왔다. 놈들에게 봉변이라도 당하는 게 아닐까. 두려움에 지배당해 지도를 돌려달라는 시도는 진즉에 숨어버렸다. 일단 정신을 집중하고 여차하면 달아날 요량으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간격을 벌렸다. 그때 빗자루가 어딘가 통화를 하더니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코뚜레와 덩어리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고 나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캐리어 손잡이만 꽉 잡았다. 따라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고 도와줄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이젠 너무 늦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차피 캐리어를 끌고 도망쳐봐야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코뚜레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쉬지 않고 덩어리에게 말을 걸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 체크했다. 덩어리는 알 수 없는 일본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음정과 리듬감이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제발 둘 다 조용히 좀 갈 수 없냐며 속으로 욕을 했다. 빗자루는 작은 횡단보도 두 개를 더 건넜는데 차가 없음에도 파란불이 바뀔 때까지 걸음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좁고 으슥한 골목 사이로 쓱 들어가더니 코뚜레와 덩어리도 뒤따라 모습을 감추었다. 달아날 기회는 이때다 싶어 내가 돌아서는 순간 밤의 적막을 깨는 큰 외침이 들려왔다. 히요리! 히요리!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주저앉다시피 했다. 골목 안에는 그토록 찾던 숙소 히요리 호텔이 있었다. 그들은 투명홀더를 돌려준 뒤 아무렇지도 않게 난바의 밤거리 속으로 다시 걸어갔다. 빗자루는 웃고 코뚜레는 떠들고 덩어리는 부르다 만 노래를 이어 부르며.

     

 3박4일 동안 오사카의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맑고 평온했다. 신이 나서 도톤보리 운하에서 맛집 투어를 다니고 오사카 성을 비롯한 여러 관광지도 빠짐없이 챙겼다. 현지인들은 기대 이상으로 친절했고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나 불편함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첫 해외여행의 기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쉼 없이 셔터를 누르며 오사카의 풍경과 사람들을 가득 담아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라 카메라에 담긴 사진들을 체크하면서 미처 담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의 시작을 선하게 밝혀준 이 불량한 난바 삼인방의 얼굴이 그것이었다. 또한 여행 중 수시로 내뱉었지만 정작 이들에게 하지 못했던 감사의  말도 생각났다. 아리가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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