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돌인가 세돌 지났나? 지 발로 서지도 못하는 애가 노래를 부르는데 가사를 한 개도 안 틀리고 부르는 거라. 동네 사람들 다 모여서 노래 듣더만 맹랑하다고 박수 치고 동전 던지고 난리도 아이였다. 그러던 야가 이래 컸네 ”
부산의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할머니가 가족들 앞에서 했던 말이다. 나의 최초 기억은 빨라 봐야 네 다섯살 정도였으니 당연히 알리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했다고? 뭐 어린애가 어른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건 예나 지금이나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천성적으로 낯가림이 심하고 나서기를 싫어하는 아이였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해야 할 때가 있긴 했어도 자발적으로 나선 적은 없었다. 물론 나는 노래를 못하진 않았고 후하게 쳐주자면 좀 잘하는 축에 속하기는 했다. 하지만 커서 조용필 같은 가수가 될 줄 알았다는 말이 부모님의 입에서 나올 때면 절로 낯이 뜨거워졌다.
처음엔 이 말의 배경에 적잖은 왜곡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부모라는 존재는 제 자식이 조금이라도 유별난 행동을 보이면 자랑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 아닌가. 어쩌면 대충 주워들은 노래를 몇 번 옹알거린 걸 마른미역 불리듯 과장해서 얘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내 노래에 관한 진술이 꽤 여러 곳에서 나왔다는 건 고무적이었다. 동네 슈퍼 아줌마, 담배 가게 할머니, 약국 아저씨, 약수터 할아버지, 심지어 몇 살 차이 안 나는 옆집 누나까지 이런 말을 했다면 거짓이라고 보긴 힘들지 않겠는가. 결정적으로 이를 확신하게 된 계기는 내가 항상 불렀다는 한 곡의 노래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최헌의 ‘오동잎’이었다. ‘오동잎’ 외에도 ‘긴 머리 소녀’, ‘길가에 앉아서’ 같은 당시 인기 있던 통기타 곡들도 불렀다는 진술이 있었지만 일관되게 언급되고 있는 곡은 오동잎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어린 나이에 오동잎을 대체 어떤 경로로 알고 부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오동잎이 발표된 연도를 찾아보니 1976년이고 내가 노래를 했다는 시기와 얼추 비슷했다. 그런데 세 살짜리 애가 노래를 스스로 찾아 듣지는 않았을 테고 분명 어디서 이 곡을 많이 들으며 자연스럽게 기억했다는 말인데 그 출처는 어디였을까. 당시 우리 집에 티비는 없었지만 전축과 라디오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을 듣고 외웠다는 자연스런 가설 하나가 세워졌다. 하지만 전축이라면 응당 LP판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내가 아는 한 최헌의 LP판은 보지 못했다. 라디오에서 들었다는 것도 그랬다. 당시 최헌은 인기가수고 오동잎이 히트곡이니 자주 나왔다 쳐도 왜 동시대의 다른 히트곡들은 부르지도 언급되지도 않았던 걸까.
나는 이쯤에서 또 하나의 가설을 끄집어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오동잎을 반복해서 흥얼거리는 걸 내가 듣고 외웠다는 것. 하지만 여기에도 모순점이 있었다. 일단 부모님은 평소에 노래, 특히 가요를 절대 흥얼거리고 부를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히 아버지는 클래식만 우대하고 잘 봐줘야 팝송을 조금 듣는 음악 사대주의에 젖은 분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할머니는 종종 작가 미상의 구전가요나 요상한 일본어가 섞인 노래들을 흥얼거리긴 했지만 대중가요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혐오하는 쪽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했다. 티비에 가수들이 나오면 딴따라 짓 하고 돈 받아먹는 것들이라며 혀를 찼다. 그럼 대체 오동잎의 진실은 무엇일까?
시간이 흐르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르는 새로운 단서 하나를 찾아냈다. 그때 우리 집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바로 대학생 셋째 삼촌이었다. 삼촌에 대한 기억이 없는 건 노래를 부르던 당시엔 내가 너무 어렸고 알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는 삼촌이 군대를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자면 삼촌은 대학생 시절 틈만 나면 골방에서 기타를 쳤다. 야단을 치고 매를 들어도 말을 듣지 않았고 급기야 가수가 되겠다면서 가출까지 했지만 결국 얼마 못 가 집으로 돌아왔다.
“ 내 앞에서 펑펑 울면서 안 그라더나. 엄마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 다시는 가수 한다고 안 그라께. 기타 저거 다 때리뿌사뿔랍니다.”
그날 이후 나는 삼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 집안에는 예술 계통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그런 토양에서 가수가 되겠다고 시도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가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삼촌은 아버지 형제 중 여자인 고모들보다도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했다. 크면서 싸움박질 한번 안 할 정도로 온순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술은 한 모금도 못 마시는 사람이었다. 이런 삼촌이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수가 되겠다며 집까지 나갔으니 놀랍지 않은가. 특히나 그 시절 가수와 연예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바닥이었다. 제대로 된 시스템도 없었고 추측건데 삼촌은 다방이나 술집 같은 곳을 전전하며 다녔을 것이다.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았을 리 없고 온갖 무시와 조롱을 받으며 여린 심성에 스크래치가 수도 없이 생겼을 게 틀림없었다. 끝내 집으로 돌아온 삼촌은 그렇게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았던 게 아닐까.
사실 나는 삼촌이 노래 부르는 걸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실제로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삼촌이 기타를 치는 걸 본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명절날 큰 집인 우리 집에 친척들이 모였고 방에서 기타 교본을 보면서 코드를 잡고 있던 나에게 삼촌은 다가오더니 몸소 시범을 보였다. 울림통을 가슴에 딱 붙이고 준비를 마치더니 곧바로 교본에 없는 곡을 아르페지오 기법으로 연주했다. 아 맞다, 삼촌은 가수가 되려고 했던 사람이었지. 이렇게 기타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지. 친척들이 모두 돌아간 뒤 나는 삼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고 상상만으로 오동잎의 진실을 재구성시켰다. 한번 들어보시라.
1970년대 중반, 부산에서 가수를 꿈꾸던 한 대학생 청년이 있었다. 그는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다. 하지만 부모, 형제 모두 이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고 그의 노래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두 평도 안 되는 골방에서 홀로 기타를 치던 이 청년은 외로웠고 누구라도 내 노래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방에서 뒹굴고 있던 두 돌이 막 지난 어린 조카를 발견했다. 자신처럼 작고 위태로워 서 있지도 못하는 이 아이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는 골방으로 데려가 한쪽 벽에 기댄 다음 기타를 잡고 노래를 한다. ‘오동잎 한잎 두입 떨어지는 가을 밤에~’ 영문을 모르는 아이는 그저 멀뚱히 앉아서 듣기만 했고 청년은 이 단 한 명의 관객 앞에서 최선을 다한다. 얼마 뒤, 이 아이가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오동잎을 부르자 여기저기서 동전이 날아든다. 청년은 자신보다 먼저 유명세를 탄 이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가수의 꿈을 더욱 확고히 다진다.
자, 어떤가. 꾸며낸 이야기지만 제법 그럴싸하지 않은가. 당연히 진실이 아닌 건 확실하다. 진실 여부는 삼촌의 입을 빌리면 바로 해결되겠지만 나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가수가 되고 싶다는 삼촌의 진정성만큼은 허구가 아닌 진짜였다. 냉혹한 현실의 칼날에 맞아 날개가 꺾이기 전, 부푼 꿈을 안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을 반짝반짝한 이 청춘의 스토리에 진실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내가 믿고 있는 오동잎의 진실은 바로 이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