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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Sep 07. 2023

M에게 보내는 편지

‘아직 가입하지 않았거나 탈퇴한 멤버입니다’라는 문구 뒤에 숨겨진 한 장의 단란한 가족사진. 동창 찾기 밴드에서 사진을 찾아낸 건 우연과 행운이 겹친 결과였어. 30년이 훌쩍 지난 뒤에야 이렇게 너를 찾았구나.

 오래전 유행했던 친구 찾기 사이트를 통해 촉발된 부산 OO초등학교 동창회 날. 잊고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 둘 자리를 채웠지만 그곳에 너는 없었어. 부산의 한 전문대학 간호학과에 진학했다는 짧은 근황 외에는 소식을 아는 이가 없더라. 이번에도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네. 앞으로도 가닿을 수 없는 허공의 말. 1986년 가을. 경주 수학여행의 밤을 기억하니?


그 시절 나는 열병을 자주 앓아 결석이 잦았어. 하지만 집에는 장기간 암과 싸우고 있는  엄마 때문에 아프다는 말은 사치였지. 아빠는 내가 아플 때면 병원에 데려간 뒤 늘 이렇게 말했어. 학교 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 엄마의 병간호에 모든 기력을 다 쏟아야 했던 아빠의 선택지는 그 정도가 전부였어. 하지만 운이 없게도 수학여행 전날 밤 열병이 난 거야. 가지 말라는 아빠의 말을 거부한 채 떼를 쓰며 울었고 보다 못한 아빠는 학교까지 찾아와 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리며 부탁했어. 

“ 애가 열이 마이 납니다. 이 약 먹이고 잘 좀 챙겨 주이소.”

 웃고 떠드는 버스 안에서 나는 약 기운에 취해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경주에 도착해서도 친구들과 떨어져 버스에만 있었어. 단체 사진을 찍을 때만 밖으로 나왔는데 모두 브이 자를 그리는 동안 혼자 기운 빠진 얼굴로 카메라를 쳐다봤지.


숙소에 와서도 열은 내리지 않았고 선생님들 방에서 외딴 섬처럼 누워만 있었어. 이렇게 있을 바에야 차라리 아빠 말을 들을 걸. 해가 떨어지기 직전 짝궁 종남이와 진욱이가 문병을 왔는데 두 사람 옆에 생각지도 못했던 누군가가 있었고 그건 바로 너였어. 수줍고 마음씨 고운 종남이는 머리맡의 물수건을 적셔 뜨거운 이마에 올려주었고 진욱이와는 늘 하던 시시껄렁한 말들을 주고받았지.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너는 불쑥 내가 가지 못했던 경주의 풍경들을 늘어놓기 시작했어. 

“천마총은 억수로 큰 게 완전 산 만 하더라. 포석정은 또랑 같아서 영 볼 거 없다. 석빙고는 우리 묵는 하드 이름이랑 똑같다 아이가. 첨성대도 디게 높은 게 옛날에 거기서 별 봤다 카더라.” 

너는 기념품으로 산 손바닥만한 첨성대 모형을 만져보라 내밀었지. 나가기 전 종남이가 얹어 준 물수건을 장난스럽게 내 턱에 반원 모양으로 걸쳐놓고는 말했어. 이따 또 올게.


어둠이 깔리자 본격적인 수학여행의 밤을 태우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창 너머로 새어들었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양호 선생님이 챙겨준 죽과 약을 먹고 선잠이 든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지. 너는 그렇게 다시 내게로 왔어. 

“민호가 장기자랑 나갔는데 똑 떨어지뿌따. 남자 방은 베개 싸움한다고 마당에 베개 다 튀나오고 난리다. 영옥이 현정이는 올때 싸우더만 삐끼가 둘이 말도 안 한다.”

시시콜콜한 온갖 이야기들이 너의 입에서 재연되었고 나는 하나라도 놓치기 싫어 귀를 기울였지. 아침부터 계속 혼자였지만 그날 밤만큼은 친구들과 함께 있다는 충만함을 느꼈어.

너는 아프니? 괜찮니? 같은 걱정과 위로의 말 대신 아픈 열두 살 아이가 가장 원하던 것을 선물해줬어. 다시 못 올 초등학교 수학여행의 소중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준 그 마음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열이 내렸고 나도 당당히 수학여행에 동참할 수 있었어. 경주박물관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에서 비로소 다른 아이들처럼 브이 자를 그리며 웃었어. 하지만 수학여행이 끝나고도 고마왔다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어. 막연한 부끄러움과 거리감 때문이었을까. 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인기 많은 너와 결석이 잦아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던 나는 가까워질 수 없다고 믿었거든. 대학을 졸업하고 경주에 놀러 간 적이 있었어. 첨성대는 생각보다 너무 아담할 정도고 천마총도 크긴 했지만 산 만 하다는 표현은 과했지. 아마도 그 시절 어린 우리에게 비친 세상은 모든 게 크고 높고 신비로웠을 거야. 어른이 되어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우리는 더 좁은 세상에서 버둥거리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너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있니? 늘 듬직하고 긍정이 샘솟던 아이. 계집애 웃음소리가 할아버지 같다는 남자애들의 놀림에도 화를 내기는커녕 되러 더 크게 허허허 웃곤 했던 아이. 이게 어릴 적 너의 모습이었는데. 나는 더 이상 열병을 앓지 않는 중년의 사내가 되었어. 너에 대한 기억도 언젠가는 탈색되어 버리겠지만 사는 동안 잊지 않도록 노력할게. 이따 또 올게 라는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워. 잊을 수 없는 행복의 기억을 간직하게 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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