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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Dec 20. 2023

크게 원을 그리자

내 여자친구에게

여자친구 : 2015년 1월16일 데뷔, 2021년 5월 22일 쏘스뮤직과 재계약 불발로 인한 잠정적 해체     


걸그룹 7년차 징크스가 닥칠만한 시기지만 중소기획의 모범적 성공 사례라 불릴 만큼 잘 나가던 팀에게 닥친 비보는 팬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기사를 본 날 나 역시 이해할 수 없는 해체 소식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사실 소녀시대 이후 나는 한 팀에게 정을 주지 못한 채 뜨내기처럼 이 팀 저 팀을 유랑하며 다녔다. 새 음원이 나오면 찾아듣고 콘서트를 하면 표를 끊고 가끔 음악프로 1위 소식을 확인하는 패턴들의 반복. 물론 그들만이 가지는 특별한 매력은 있었다. 유난히 한글 제목과 가사를 가진 곡들이 많아 노랫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몇 안 되는 팀이고 익히 알려진 칼군무와 멤버 간 가창력의 편차가 크지 않다는 건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시대 다른 걸그룹보다 특별한 애정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장점과 매력은 다른 팀도 가지고 있는 거니까.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은 어쩌면 이 팀이 내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나에게 깊이 들어와 있진 않았어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들과 함께 했던 기억들을 하나씩 되돌아보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갔던 단독 콘서트. 걸그룹 콘을 자주 다니다 보면 그날의 순서와 공연 분위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게 된다. OO가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군. 이 곡의 무대는 오늘 기대할만해. 팬들에게 감사멘트 칠 타이밍이네. 앵콜곡은 이걸 부르겠구나. 자 이제는 눈물 흘릴 시간. 팀과 상관없이 익숙한 무대 공식과 식상한 멘트들은 감동보다 무감각이 앞서곤 했다. 하지만 그날 공연에서 리더 소원이 했던 멘트는 인상적이었다. 연습생 시절 중소 기획사 출신의 기약 없는 불안정함만큼 힘들었던 건 멤버들이 떠나가는 것이었다고. 실제로 여자친구는 멤버 교체 때문에 데뷔가 상당 기간 미뤄졌는데 리더로서 함께 연습을 하며 한 팀이라 믿었던 이가 한순간에 남남이 되어버리는 순간들을 보는 게 고통스럽고 그 때문에 많이 울었다고 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공했고 멘트의 진정성은 본인 외에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가식이라 느껴지진 않았다. 우리 각자가 하는 말은 얼마나 솔직하고 진정성이 있다 자신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걸그룹 중 노력하지 않는 팀은 없지만 인간미 없어 보이기까지 한 그들의 칼군무를 보면 잘한다는 인식을 넘어 그 속에 담긴 시간들에 대한 안타까움 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서 뭔가 더 응원해주고 힘을 보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여자친구의 해체 소식을 들었던 2021년 봄. 나는 안팎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새로운 일을 해보겠다며 야심차게 프리랜서 선언을 했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실패였고 다시 십 수 년을 몸담았던 회사의 아가리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좌절감. 안으로는 적잖은 내상을 감수한 채 가까운 사람과의 원치 않은 이별을 겪어야 했던 상실감. 그날 저녁 휴대폰에 여자친구의 모든 곡들을 걸어놓고 밤이 늦도록 재생했다. 아, 이렇게 맑고 아름다운 곡들을 참 많이도 불렀는데 너희들도 이제 내 곁에 없구나. 이 노래들이 트리거가 되어 굳어있던 눈물샘을 마침내 터트려 버렸다. 그 눈물 속에는 지난 시간에 대한 희로애락의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마지막 앨범의 마지막 트랙 ‘앞면의 뒷면의 뒷면’을 듣고 나서야 나는 눈물을 완전히 닦았다. 그날 이후 마치 그들의 미래를 예견이라도 하는 것처럼 의미 있는 가사로 채워진 이 곡은 내 여자친구 최애곡이 되었다.


 https://youtu.be/s0tTTlMbH3A?si=mFHduQvgcTXbqy7w 

뭐가 정답일까 두려워하지 마

앞면의 뒷면 그 뒷면은 또 뭘까

시작과 끝은 정해진 게 아니야

One way 우리는 크게 원을 그리자

달려 지금 이 꿈길을

달려 지금 이 현실을

달려 더욱 더 짙어져

우리가 그리는 원     


시작과 끝이 정해진 게 아니듯 아무리 큰 원을 그려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일이든 사랑이든 관계든 새로 출발할 수 있다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나도 다시 원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자, 크게 원을 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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