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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유 Dec 26. 2023

89년 태평양 돌핀스의 신인 삼총사

프로야구 낭만의 시대를 추억하며

부산에서 태어난 롯데 자이언츠의 골수팬인 내가 한때 태평양 돌핀스의 팬이었다고 얘기하면 대부분 의아한 반응을 보인다. 당시 인천이 연고지였던 태평양과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태평양의 팬이 맞고 정확하게는 삼미 청보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인천 야구팀을 응원했었다. 흔히 인천 야구의 역사는 삼청태현 으로 묶이지만 현대는 수원 도주사건도 있고 기본적으로 삼청태와 달리 강팀의 이미지가 강했다. 롯데 팬인 내가 삼청태를 응원했던 건 약팀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페이소스를 느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낭만의 시대에 걸 맞는 팀들이라 할 수 있었다.     

뭔가 허술한 구석의 슈퍼맨, 당나귄지 조랑말인지 모르겠는 동물, 공격성 따위는 없어 뵈는 돌고래. 마스코트만 봐도 사자 호랑이 용이 날뛰는 판에 끼기에는 졸라 약해 보인다

    

실제로 삼청태는 야구를 진심으로 못했다. 장명부의 팔을 갈아대서 성적을 낸 83년을 제외하면 88년까지 늘 승보다 패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던 89년, 태평양 돌핀스에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팀이 바뀌기 시작했다. 오대산 지옥 훈련이라 일컫는 동계캠프 과정은 흡사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연상시켰다. 그런 무식한 훈련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가는 미지수지만 패배의식에 젖어있던 선수들에게 자극제가 된 것만은 확실했다. 시즌 개막과 동시에 꼴찌 태평양의 반란이 시작되었고 정규시즌을 3위로 마치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 중심에는 이른바 신인 삼총사라 불리는 세  투수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이 있었다. 그 중 정명원만 순수 신인이고 나머지 둘은 이른바 중고 신인으로 직전 해까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던 선수였다. 

    

니들은 다 죽었어. 지옥이 뭔지를 알려주마. 다들 얼음물속에 쳐 박힐 각오를 하도록.

  

삼총사의 에이스이자 1 선발 박정현. 킹콩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고졸투수는 190 이 넘는 장신의 언더핸드 투수다. 바닥에 붙을 정도로 낮은 위치에서 솟구쳐 오르는 변화구에 타자들은 당황했고 잠수함 투수치고 피 홈런이 극도로 적어 대량실점을 하지 않았다. 박정현은 역대 신인 최다승인 19승을 올리며 다승 2위, 방어율 2위로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시즌 중의 눈부신 피칭에 이어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는 말 그대로 투혼의 드라마였다. 1차전 14회 173구 완봉승을 기록한 뒤 겨우 이틀을 쉬고 3차전에 구원 등판하며 승리를 지켜냈다. 비록 팀은 승리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마지막에 부상 중인 허리를 부여잡은 채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박정현은 플레이오프에 출전하지 못했고 훗날 혹사의 여파를 혹독히 치르게 된다. 고질적인 허리와 발목 부상에 시달리며 우승반지와 골든글러브도 끼지 못한 채 쓸쓸히 은퇴했다. 당시 박정현이라는 투수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대단한 선동렬과 맞장을 뜰 정도였으니 그의 이른 은퇴를 바라봐야했던 내 마음도 안타까움으로 얼룩졌다.     


감독님 제가 볼링공입니까. 왜 그렇게 굴리셨어요?미안하다 정현아. 우짜겠노 니가 제일 잘 던지는데.



삼총사의 제 2 선발 최창호. 그 역시 89년 박정현 못지않은 임팩트를 남기며 전체 투수 WAR(승리기여도) 3위에 올랐다. 당연히 1위는 선동열이고 2위는 박정현이었다. 174cm의 작은 키에 체격도 일반인 수준으로 아담하지만 닥터 K 라 불리며 많은 삼진을 잡아냈다. 특히 중간에 한번 멈칫하며 던지는 특이하고 역동적인 투구 폼이 인상적이었는데 당시 동네야구에서 이 폼을 따라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개인적으로도 삼총사 중 제일 좋아했던 투수였다. 최창호 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불운’ 이다. 시즌 내내 엄청난 활약을 하고도 겨우 10승밖에 거두지 못했고 반대로 패는 14번이나 떠안았다. 물론 당시 태평양의 타선은 막강한 투수력과 반대로 노답인 건 사실이었다. 4번 타자 포수 김동기를 제외하면 위압감을 주는 타자가 한 명도 없었다. 득점 루트 역시 주로 도루왕 김일권이 출루해서 2루를 훔치면 김동기가 적시타를 때려서 점수를 뽑는 형태였고 대부분의 타자들은 밥값을 못했다. 특히나 유독 최창호만 등판하면 안 그래도 물 방망이 타선이 개점휴업 상태에 돌입했다. 최창호 역시 우승반지를 끼지 못하고 은퇴했는데 박정현과 달리 한국시리즈 마운드를 밟아본 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타자 이 개객끼들, 니들은 나만 나오면 왜 그래. 야구를 하랬더니 축구를 하고 자빠졌냐. 2점 이상 내는게 그렇게 힘들더냐.


     

삼총사의 제 3 선발 정명원. 사실 그는 89년 성적만 놓고 보면 박정현 최창호에 비해 인상적인 편이 아니었다.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11승을 거두고 방어율 4위에 올랐지만  WAR 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고 이닝 소화력도 떨어졌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리자라는 말이 있듯 결국 최종승자는 정명원이었다. 박정현과 최창호가 혹사여파로 해가 거듭될수록 성적이 하락했는데 반해 혹사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정명원은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마무리 투수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선발로는 한국시리즈 노히트 노런과 함께 두 사람이 갖지 못했던 우승반지까지 끼는 행운을 누렸다. 그는 현대에서의 첫 우승 인터뷰 소감에서 " 같이 동고동락해왔던 창호, 정현이가 이 자리에 없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 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러니하게도 89년 당시의 평가는 박>최>정 이었는데 마지막엔 정>최>박 으로 완전히 뒤집힌 걸 보면 인생은 결국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내 기억 속의 정명원은 다혈질에 정면승부를 즐기는 강골 스타일로 많이 맞기도 했지만 그만큼 자신감 넘치는 공을 던져대는 멋진 투수였다.


      

창호야, 인생이란 원래 공평하지 않단다. 그래도 우승 순간을 같이 못해 아프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1989년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인터넷이 없고 티비 중계도 드물던 시대여서 야구중계는 거의 라디오로 들었다. 우리 가족 모두 롯데를 응원하던 그해 나는 방에서 혼자 라디오를 켜놓고 태평양 돌핀스와 이 신인 삼총사를 뜨겁게 응원했다. 그때 태평양의 돌풍이 가져다준 감동은 3년 뒤 롯데의 우승과 맞먹을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었다. 세상에 만약이라는 건 없다지만 만약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에이스 박정현이 건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물론 삼총사가 아무리 잘 던져도 태평양의 허약한 타선으로 막강 해태를 이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왕에게 모든 힘을 다 쏟아 붓고 허무하게 패배한 북산처럼 일방적인 3연패로 탈락하지는 않았으리라.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신인 삼총사는 당시 해태의 레전드인 선동렬 이강철 조계현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대부분 태평양 돌핀스 최고의 해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94년으로 꼽지만 누가 뭐래도 나에게 태평양 최고의 해는 이 신인 삼총사가 활약한 89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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