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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 Jan 14. 2024

2년째 만년필 입문중

첫 만년필을 고민하고 있다면

  본토에서 세일러 만년필 하나를 건져오리라.
  일본 여행을 앞두고 세웠던 작은 계획이었다. 그것도 백 년 된 가게라는 홋카이도의 센트럴 문구점에서. 센트럴 한정판도 살펴보고, 꼭 그해 한정판이 아니더라도 내눈에 예쁜 걸 업어오리라 마음을 먹었다. 먹었건만...

  영롱한 펜대 앞에서 계속 망설이기만 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펜촉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필감은 부드러운데 바늘보다도 가느다란 선을 구현하는 EF촉(가장 가는 촉)으로 글씨를 오밀조밀 써 나가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평소 즐겨 쓰던 M닙을 테스트해보곤, 왜 주변 사람들이 세일러 EF촉만 얘기하고, M닙은 추천하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나에게 무한정 세일러 펜을 소장할 기회가 생긴다면 M닙부터 쟁일 것이다.


  하지만 센트럴을 나서면서 내 손에 들려있던 건 결국 묶음 행사를 하던 잉크 세 병, 그리고 저렴한 나머지 그냥 벌크로 팔던 카웨코 스포츠였다. 몇십만원을 주고 이 펜을 살 만한가? 여러 모로 자신이 없었다. 1년만에 사무실 모니터를 깨먹은 마이너스의 손인데다, 중학교 때 잃어버린 하이테크 C펜은 또 몇 자루인가.

  HI-TEC-C라는 라벨이 붙은 이 펜은 한 자루 2,500원으로 그당시 중학생에겐 초고가의 펜이었다. 너무 가늘다 못해 긁히는 듯한 느낌. 그러고보니 세필이라는 점은 세일러와 비슷하다. 필통 속의 펜을 몇 번 잃어버리고 나선 교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도, 어느샌가 사라졌던 수많은 나의 하이테크씨. 기왕 사면 여기저기 들고다니면서 많이 쓰자는 주의인데, 2,500원도 아니고 25만원짜리 펜이라고 해서 내가 오래오래 잘 들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나마 일본 브랜드인 줄 알고 사온 카웨코도 숙소 와서 보니 독일제였다. 이 무지함이 스스로도 부끄러울 정도! 그렇게 나의 만년필 업그레이드(?)는 실패로 끝나고 입문용 만년필만 늘렸다.

  플래너를 열심히 쓰는 데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부턴가 마스킹테이프, 메모지, 스티커 같은 문구류를 사모으면서 어렴풋이 예감했다. 만년필 세계에 한번 발을 들이면 어마어마하게 지출을 하게 될 것 같다고. 그래서 가끔 문구덕후들이 만년필 얘기를 하더라도 눈막고 귀막으려 애썼다. 그러나 만날 것들은 만나게 되어 있나보다.

"이거 내가 카트리지를 잘못 샀던 건데, 그냥 너 한번 써보라고 펜까지 샀다."
하고 선배가 내민 파카 조터.

  그렇게 만년필의 사각거림에 빠져버린 이후 내 돈으로 처음 들인 펜은 파이로트에서 나온 프레라였다. 첫 펜을 프레라로 고른 과거의 나를 진심으로 칭찬한다. 음, 정말 칭찬한다.
  프레라 M닙을 쓰면서 잉크의 농담을 표현하는 굵은촉의 매력을 알게 됐고, 내 글씨도 이 정도 굵기에서 더 예뻐 보인단 것도 깨달았다. 글씨를 처음 쓰는 순간 그 부드러운 느낌에 반했는데, 뚜껑을 닫을 때에도 착 미끄러지며 닫히는 느낌이 또 이 펜의 개성.
  그 다음 들인 펜은 라미 사파리 2022 에디션이다. 라미가 유명한 브랜드이기도 하고 디자인이 예뻐서 샀다. 상당히 사각거리는 편. EF촉인데 생각보단 좀 굵다.

그리고 생일 선물로 잉크를 받았다. 잉크를 당장 쓰려면? 새로운 펜이 필요했다. 검은색 잉크라 들고 다니면서 막 쓰려고 만원짜리 카쿠노를 샀다. 쭉 저가형을 사곤 있지만 카쿠노는 유난히 만년필스럽지 않은 디자인이라 좀 망설였다. 펜촉에 스마일이 그려져 있는 것도 좀 유아스럽게 느껴졌었다.
  막상 쓰고 나니 펜이 마음에 쏙 들어서 그 스마일이 어찌나 귀여워 보이던지. 지금도 주변에 만년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사람 있으면 일단 카쿠노를 추천한다. 파이로트에서 만든 거라 그런지 프레라와 같은 닙이라는데, 내가 이 회사 펜 촉감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내가 너무 메이드 인 재팬만 좋아하는 것 같아서 동북아의 다른 나라 브랜드로 눈을 돌려봤다. 트위스비 에코. 잉크가 아주 넉넉하게 들어간다. 그동안 내 손 작은 것만 믿고 작은 펜들을 샀더니 잉크가 고양이 눈물만큼씩 들어가서 뭐 좀 써보려고 하면 잉크가 안 나오는 사태가 종종 있었다. 이게 불편하다는 것조차 트위스비 에코를 쓰면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버터 필감이다. 프레라와 카쿠노도 부드럽긴 한데 사각사각을 동반한 부드러움이라면 트위스비는 쭉쭉 미끄러진다. 다만 쭉쭉쭉 쓰다보면 둔한 나조차 '어, 이 잉크가 이렇게 흐렸나?'라고 멈칫하게 된다. 피딩이 달린다고도 표현하는데, 계속해서 쓰다보면 펜에 남아있는 잉크가 잘 안 흘러나온다.
  필통을 보면서 깨달았는데 나에게도 딱 하나의 탈입문급 만년필이 있었다. 바디색깔만 보고 충동구매한 펠리칸 M205 아파타이트. 가장 사랑하는 잉크인 이로시즈쿠 송로를 넣고 싶었다.

이 가격대 펜을 테스트도 안 해보고 사다니, 이럴 거면 비싸지 않은 세일러 펜 하나쯤 살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적어도 만년필에 대해선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 믿었는데 갈길이 멀다.

덧) 조금 더 합리화를 해보자면, 내 머릿속에선 '세일러=각종 한정판'이어서 비싸다는 이미지가 박혀있는 듯하다. 한국 펜샵 한정 제품까지 있으니. 기왕 세일러를 산다면 한정판을 갖고 싶다는 상술(?)에 휘말리니 점점 비싼 게 보여서 지름을 망설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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