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칼 루이스 VS 벤 존슨
영화 ‘친구’ 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 조오련과 바다 거북이가 수영 시합하면 누가 이길까?
시대와 세대를 막론해 이런 VS 놀이는 사람들의 입맛 거리로 종종 오르내린다. 1988년 9월 서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있던 부산의 한 중학교 교실에서도 이런 VS 놀이가 한창 불타오르고 있었다. 남자육상 100미터 칼 루이스와 벤 존슨 중 누가 이길까?
올림픽 붐은 우리 집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역사적인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큰맘 먹고 금성(일명 골드스타) 비디오 플레이어를 구입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라는 금성의 슬로건처럼 아버지는 자신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일차적인 목적은 88 서울올림픽 중계를 녹화하기 위해서였다. 납작한 검은색 비디오 플레이어가 도착하자 우리 형제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것만 있으면 티비에서 하는 코미디나 쇼 프로도 녹화 가능하고 성인 비디오도 몰래 빌려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던 날 이 삼부자는 개업 커팅식이라도 하는 양 새 VHS 테이프를 데크에 밀어 넣고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붉은색 녹화 버튼을 눌렀다.
서울올림픽은 지난 두 번의 반쪽짜리 올림픽이 아닌 12년 만에 동서 냉전의 벽을 깨고 전 세계가 참가한 의미 있는 대회였다. 각 종목마다 걸출한 스포츠 스타들이 총출동했는데 특히 육상의 하이라이트 남자 100미터 결승은 세계적으로 초미의 관심사였다. LA 올림픽 4관왕인 황제 칼 루이스와 세계 기록 보유자 벤 존슨의 승부가 펼쳐지기 때문이었다. 이는 선수를 넘어 미국과 캐나다의 국가 간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칼 루이스는 설명이 필요 없는 육상의 레전드이자 상징이었다. 칼 루이스가 얼마나 유명한 선수인가 하면 그의 이름을 딴 게임도 나오고 소년 잡지에도 사진이 실려 한국의 꼬맹이들조차 다 알 정도였다. 학교에서 달리기를 잘하는 애들은 칼 루이스라는 별명이 자연스레 붙었다. 한편 벤 존슨은 몇 년 전만 해도 다크호스 정도로 주목받다 87년 세계선수권에서 9.83초의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칼 루이스를 제치고 우승했다.
한편 교실에선 칼 루이스파와 벤 존슨파가 반반으로 나뉘어 100분 토론에 버금가는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 병신아, 벤 존슨은 칼 루이스한테 쨉도 안 돼.
- 그런데 왜 졌냐. 칼 루이스는 이제 한물 갔어.
- 잠깐 방심해서 진 거지. 이번엔 칼 루이스가 무조건 이겨. 벤 존슨 키도 작달막한 게.
- 칼 루이스는 그냥 멀리뛰기나 하라고 해. 괜히 나와서 쪽이나 당하지 말고.
급기야 이들은 누가 이길지 내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진 쪽이 이긴 쪽에게 천원을 주는 일명 천원빵 내기였다. 체육 시간에도 양쪽 파 아이들은 자신이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이라도 된 양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 달리기 시합을 했다.
나는 내기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어느 쪽이냐면 묻는다면 벤 존슨이었다. 왕방울처럼 큰 눈에 빡빡 깎은 대머리, 터질듯한 근육으로 무장한 야수 같은 마스크는 나를 단번에 매료시켰다. 최근 기록으로 보자면 칼 루이스가 언더독이지만 그의 스타성을 생각해보면 이상하게 벤 존슨이 도전자 같았다. 둘은 61년생 동갑내기지만 마치 칼 루이스는 과거의 스타, 벤 존슨은 라이징 스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신흥강자 벤 존슨이 칼 루이스를 멋지게 누르고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기를 바랬다.
100미터 결승이 열리던 날은 추석 연휴의 시작이었다. 10초 남짓의 가장 짧은 순간에 승패가 결정 나는 종목 남자 100미터. 선수들은 이 10초를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시간을 바쳤을까. 이번에도 우리 삼부자는 비디오 녹화 버튼을 누른 뒤 숨소리조차 죽이며 티비에 몰입했다. 초반부터 치고 나간 벤 존슨은 후반으로 갈수록 칼 루이스와의 격차를 더 벌렸다. 10초 동안 캐스터에게서 벤 존슨을 외치는 샤우팅이 몇 번이고 터져 나왔다. 골인 직전 금메달을 확신한 벤 존슨은 오른팔을 번쩍 들어 승리를 자축했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은색 목걸이가 출렁거렸다. 9.79초 세계신기록. 미국의 상징 칼 루이스를 올림픽 무대에서 이긴 것도 모자라 자신이 가진 세계신기록까지 갱신했으니 그야말로 센세이션 간지 그 자체였다. 이제 칼 루이스의 시대가 가고 벤 존슨의 시대가 열렸구나! 내 입에선 절로 환호성이 튀어나왔고 이후에도 녹화된 테이프를 여러 번 돌려보았다.
추석 연휴 기간 한국은 유도의 김재엽과 이경근이 금메달을 추가하며 순조로운 메달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연휴가 끝나고 등교하자 역시나 칼 루이스와 벤 존슨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벤 존슨이 이겼으니 당연히 벤 존슨파가 돈을 따고 기세등등 할거라 예상했는데 교실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 야, 벤 존슨이 약물 했다는 거 신문에 봤어?
- 뻥 치지 마 새끼야. 나도 아침에 신문 봤는데 그런 얘기 없었어.
- 아 진짜 미치겠네. 내가 분명히 봤다니까!
칼 루이스 파의 한 녀석이 벤 존슨이 약물에 걸렸다는 기사를 봤다고 반복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칼 루이스 파 아이들조차 헛소리로 치부했고 그는 양치기 소년으로 몰린 양 억울해하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그의 말은 사실로 드러났다. 지금 같은 스마트폰 시대에는 확인이 바로 가능했겠지만 정보의 흐름이 느리고 제한된 시대라서 발생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벤 존슨은 금지약물 양성 반응으로 3일 만에 금메달을 박탈당했고 2위를 한 칼 루이스에게 금메달이 돌아갔다. 벤 존슨 파에게는 천원을 잃는 것보다 마음의 상처와 굴욕감이 몇 배로 더 컸다. 나 역시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 그렇게 응원했던 벤 존슨이 약쟁이라니. 벤 존슨의 약물 파동 이후에도 한국의 메달 소식은 연일 이어졌지만 올림픽에 대한 흥미는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한국은 마지막 날까지 금메달을 추가하며 종합 4위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렸고 88 서울올림픽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칼 루이스는 이후 두 번의 올림픽에 더 참가해 금메달 9개를 따내며 우사인 볼트가 등장하기까지 육상 레전드의 자리를 지켰다. 반면 벤 존슨은 자신이 세웠던 기록까지 말소되며 복귀 후 이렇다 할 활약 없이 쓸쓸히 퇴장했다. 훗날 칼 루이스를 포함해 그날 레이스에 참가한 대부분의 선수가 도핑에서 약물 양성 반응이 나왔으니 혼자 약물의 오명을 뒤집어쓴 벤 존슨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약물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고 스포츠 경기에서 약물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되어선 안 된다. 이후 각종 스포츠계의 약물 이슈가 끊임없이 터져 나와 과거 벤 존슨의 약물 이력이 상대적으로 묻히긴 했지만 나에게 벤 존슨은 여전히 약물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88 올림픽 한국 선수단의 눈부신 활약보다 벤 존슨에 대한 기억이 먼저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씁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