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동안 할 수 없었던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낸 직후였다. 나도 함께 울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서가 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나는 조금 더 숨죽여 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문득 시계를 보았다. 내 눈을 의심했다. 6시간이 지나있었다.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20분 만에 하늘나라로 떠나신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른 지 일주일쯤 지난 후인 2017년 어느 따스한 봄날 점심시간이었다. 한 살 많은 형님인 나는 가장 고생한 우리 둘이서 회포라도 풀자며 동서를 불러냈다. 동네에서 제일 비싸고 세련된 한정식집을 신경 써서 예약하며 혹시 숫기 없는 동서가 어색해서 거절할까 봐
약간 긴장도 했었던 것 같다. 결혼한 지 18년 만에 처음으로 동서와 단 둘이서만 밖에서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왜 이런 시간을 갖지 못했던 것일까?
우리 두 사람은 왜 매사에 그리도 조심스럽고 또 늘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일까?
당연히 서로 한 번도 속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동서는 나의 전화 한 통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왔고 맛있게 밥을 먹은 후 지금, 내 앞에서 한 없이 우는 중이었다.
"일주일 간격으로 결혼하라고 하신다고? 에잇 농담이죠?"
"농담 아니에요.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하시네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는데 나, 지금?"
내 귀를 의심하며 내가 재차 묻자 그 남자는 말했다.
"문영 씨도 알다시피 동생네 커플이 연애한 지가 7년이에요”
존댓말을 쓰는 남자와 거의 반말인 여자. 우리는 당시 연애 4년 차였다.
“실은 자기가 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는데 부모님이 동생네 결혼을 반대하셔서 미루고 기다리다가 회사 앞에서 동거한 지 좀 됐거든요. 그런데 임신을 했네요. 아마 일부러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아 그랬구나. 우리 커플만 결혼반대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니. 거기다가 반대를 무릅쓰고 동거를 단행하고 임신까지 했다니 순간 뇌가 포즈를 누른 듯 멍해졌다.
뭐야 이거. 의문의 1패인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기분이 찜찜했다.
이 이야기의 상황 전개는 이러하다. 동생네 커플이 임신한 것을 아신 부모님은 할 수 없이 당장 결혼을 하라고 통보하셨고, 우리 집안에 형보다 동생이 먼저 결혼하는 법은 없으니 우리 보고 먼저 결혼을 하되 일주일 후 바로 동생네가 식을 올리도록 결혼 날짜를 잡으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나름의 긴 시간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숱한 위기를 만났지만 결혼 허락을 기다려왔는데 폭풍같이 결혼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왠지 밀려서 결혼하는 당시의 기분이 허무하고 유쾌하지 않았지만 우리 커플은 가장 적절한 때에 결혼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 간격으로 차례대로 서로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한 집안의 두 며느리가 되었다.
그래도 동서는 어쨌든 결혼 전에 미혼인(?) 몸으로 참석했지만 나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트렁크를 풀기도 전에 한복으로 갈아입고 형님이라는 존재로 변신한 후 헐레벌떡 동서의 결혼식 미사에 뛰어갔다.
결혼식장에는 바로 지난주에 만났었던 똑같은 친척들이 같은 옷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되는 정장과 한복을 입고 여기저기 서 있었다. 속으로 끅끅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옷도 드라이도 못하고 그대로 걸어놨다가 입고들 오셨겠지?'
철없던 1주일 차 새댁은 이 상황에 오히려 조금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관전도 잠깐. 식이 진행되자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이 갑작스레 몰려왔다.
그것은 서러움. 약간의 슬픔.
그래. 그런 단어들 말고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놀라 울컥거리다가 결국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남몰래 닦고야 말았다.
동서도 나도 그때 막 2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었다. 응원받고 축복받아야 할 귀한 가정의 출발이, 이렇게 억지로 허락을 받아내고 해치우듯 결혼식을 해야만 하다니. 우리의 속수무책이었던 20대가 속상했다.
'우리는 4년이었지만 이 커플은 무려 7년 동안이나 시부모님의 상처를 받아 삼키고 위기도 얼마나 많이 겪었을까. 지켜진 사랑이 기특하다. 저렇게 부부가 되었네. 대견하다.'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서네 커플에게 말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혼잣말을 눈물과 함께 삼켰다.
"어머 안됐다 얘. 일주일 만에 새댁이 헌 댁 되었네"
..........
동서의 결혼 미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마주친 남편의 작은 어머님이 던진 말이었다. 앗 가슴 한편에 돌멩이가 되어 드르륵드르륵 맴도는 느낌.
'그러게요 호호' 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넘겼지만 일주일 만에 새신부가 들어와 나는 헌 댁이 되었다는 말이 또 서럽기 그지없었다. 왠지 이 집안에서의 나의 정체성이 계속 그렇게 정의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지금까지도 그 말이 잊히지 않는 것을 보면 꽤나 인상적인 상처였던 것 같다. 안 해도 되는 말은 하지 말고 살자고 결심하기도 했던, 말의 기억이었다.
한정식집의 사장님은 우리가 우는 모습을 목격했음에 틀림없다. 음식 그릇들을 치우고 매실차와 과일 후식이 나온 후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는데도 우리 곁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역시 비싼데라 그런지 눈치도 안 주고센스가 최고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동서와 나는 식당 옆에 마련된 한쪽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따끈한 커피가 속을 타고 내려오면서 18년 동안의
눈물을 밖으로 내어놓느라 건조하고 퍼석해진 우리 두 사람을 촉촉하고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동서는 한숨을 크게 한번 쉬고 말을 이어갔다.
"민준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돼서 어머님이 양수리 집으로 데려가셔서 거의 키우다시피 하셨어요. 제가 그때 일도 그만둔 상태라 충분히 키울 수 있었는데 저를 못 믿으셔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저와 상의도 없었고요.
"내가 좀 데리고 있으마. 애가 비염이 심해 잠도 못 자고 잘 먹지도 못하잖니. 애 꼴이 이게 뭐냐. 아버지랑 내가 데리고 갈 테니 주말에나 와라."
그렇게 시작된 어머니의 반강탈 양육 주도권은 쉽게 동서에게로 넘어오지 않았다. 주말에 아이를 보러 가도
"애는 놓고 가지 그러냐" 어김없이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동서는 "아니에요. 어머님. 제가 데리고 가야지요." 하고 쉽게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민준이가 저와 사이가 안 좋고 사춘기를 지독하게 앓는 것은 세 살 아니 거의 6살 때까지 주 양육자가 엄마인 제가 아니고 할머니였고 자꾸 집과 시댁을 왔다갔다한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민준이는 할머니가 자신을 사랑해주신 것은 알지만 정작 엄마인 저는 잘 따르지를 않았어요. 저는 아이가 집에 오면 아무래도 할머니보다는 단호하고 엄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뿐이 아니에요. 어머님은 모든 것이 트집이셨어요. 제 피부가 까무잡잡하다고 그것도 싫다고 하셨고요. 한 번은 지나가는 스님이, 저 때문에 남편이 힘들어진다는 소리를 했다는데 그때는 저보고 헤어지라고 까지 한 적이 있으세요. 믿어져요? 언니?"
나는 하마터면 그 동네 스님이라는 사람에게 욕이 튀어나올뻔했다.
그나저나 동서는 어느새 나를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 나는 정말 몰랐다. 현실보다 오히려 리얼한 것도 아니라는 평을 들었던 리얼 드라마 '사랑과 전쟁' 같은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우리 부부는 지난번 글에서도 밝혔듯이 결혼을 한 이후 부모님을 정기적으로 찾아뵙고 용돈도 드리면서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부모님이 더 이상 선을 넘어 간섭하지 못하시도록 매사 단호한 태도를 취했었다. 이때 남편의 역할이 컸다. 나는 겁도 많았지만 남편이 잡은 방향이 앞으로 건강한 우리 가정을 세워나가는데 옳다고 믿었고, 믿음직한 남편 뒤에 모르는 척 숨어서 나는 상냥함을 유지하고 착한 역할을 맡았다. 당연히 남은 악역은 남편이 했고. 어머님도 마음을 내려놓으셨는지 언젠가부터 우리 부부에게는 별 간섭도 관심도 없으셨다. 우리에게도 1년 뒤 아들이 생겼지만 단 한 번도 맡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늘 강 같은 평화가 유지되었었을까?
난 우습게도 내심 동서 부부가 부러웠던 적이 많았다. 시부모님이 우리 가족만 빼고 동서네와 놀러를 다니는 정황이 자주 포착되었고 무언가 내가 모르는 일들이 점점 늘어갔다. 동서는 사랑받는데 나는 왕따를 당하는 것 같아서 질투를 느꼈고 부러웠다.
결혼 후에도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맏며느리가 된 것 같은 마음의 상처가 종종 나를 휘감을 때면 죄없는(?) 남편에게 화도 내고 서러워 울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알고는 있었다.
내가 시어머니라도 시부모님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라면 반대 없이 그대로 따르고, 매사에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동서가 더 편하고 예쁘셨겠지.
그런데 18년이 지나고 그날 알게 된 사실은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나에게 온통 소외감을 안겨주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 동서가 지금
내 앞에서, 사는 동안 내가 제일 부러웠었다고 말하며 울고 있었다. 동서의 남편 즉 서방님은 한 번도 자신의 방패가 제대로 되어준 적이 없었단다. 골백번도 더 헤어지려고 했지만 참았다고하면서.
아주버님이(나의 남편) 어느 날 나타나서
"야 네가 정신 차리고 네 와이프 지켜. 어머니 말만 듣지 말고"라고 말한 그날 이후에서방님의 태도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살기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18년 동안 어머님께 툭 하면 불려다니며 온갖 잔 심부름을 해야했고 마치 종 같은 마음으로 살았다는 동서의 말에 가슴이 찢어졌다.
사실 그날 나는 동서에게 비싸고 맛있는 밥을 사주며...
"동서 내가 말이야그동안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고 부러웠었는지 모르지" 라고 속 이야기도 하고 이제 재밌게지내자며 털어버리려고 했었는데.....
나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6시간 동안 울며 읍소하기를 반복하는 동서를 달래며 함께 울어준것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오늘 동서는 서방님과 평안하고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
매년 1년에 한번은 형제부부가 함께 제주도로 여행도 떠납니다.
다음화에서는 저와 동서가 두 사람만의 첫 데이트 후 서로를 견제하거나 어색해하지 않고 어떻게 잘 지내는지, 우리가 이혼 안 하고 잘 살 수 있었던 이유들, 그리고 어머님이 돌아가시기전 마지막 만남에서의 반전대사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