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우리 엄마 아빠 싸우지 말게 해 주시고 저 얼른커서 결혼하게 해 주세요. 멋진 남편을 만나게 해 주세요. "
안방에서는 엄마의 목놓아 우는 소리와 아빠의 고함소리가 새벽이 되어도 문밖으로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들은 귀를 아무리 막아보아도 고스란히
내 젖은 영혼속으로 들어왔다.
세월이 흘러 나는 스물세 살의 어른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의 꿈이었던 방송국에 취직도 했다. 대학을 졸업도 하기 전에 당시 동기들 중
가장 어린 나이로 합격을 해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낮에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해 보이는 20대의 모습으로 치장하고 살았다.
하지만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하는 기도는 변함이 없었다.
“하나님 빨리 자상하고 나만 사랑하는 멋진 남자가 나타나 결혼하게 해 주세요. 그래서 이 집을 나가게 해 주세요. 제발 “
기도의 내용도 일곱 살 때 그대로였다.
그리고 정말, 그런 남자를 만났다.
치열한 경쟁이 난무하던 방송국 생활 4년 차를 보내던 어느 날 나는 주저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를 그만두고 결혼을 선택했다. 동료들은 내가 왜 그토록 결혼에 목을 매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 사랑이 꿈이 될 순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꿈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세상을 이상하게 여기며 나는 결혼했다.
한창 결혼을 준비하던 어느 날 시부모님께서 먼저 당신들의 아들을, 그리고 곧 며느리가 될 나를 따로따로 부르셨다.
"너네들이 만약에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하고 성당식으로 결혼식을 해준다면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결혼 예비자금도 주겠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하마터면 네 그러시죠 뭐' 하고 대답할뻔했다.
하지만 남편이 될 나의 남자는 달랐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친척들과 교우들 앞에서 체면을 세우고 자랑하고 싶으신 부모님의 마음은 알겠지만, 천주교인도 아닌데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결혼도 결혼식도 어디까지나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의견을 합한 상태였다.
그리고 내 남자, 즉 그분들의 아들은 알고 있었다.
당시 막 정년퇴직을 한, 돈 없는 공무원이셨던 아버님께서 그런 것들을 마련해주시려면 빚을 내야 한다는 것을.
부모가 자식을 결혼시킬 때 빚이라도 내서 집이며 기타 등등을 얻어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였으니까.
하긴 얼마 전 '우리 이혼했어요'라는 프로그램에서 '최고기'의 아버지도, 어려운 형편에 빚을 내서 신혼집을 마련해주었고 그것을 갚느라 아버지도 당자사인 최고기도 마음고생 생활 고생 그리고 처가와의 불화까지 겹쳐지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면 여전히 그런 문화가 있는것 같다.
'최고기'도 후회했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오로지 우리 힘으로 시작해야 했었다고.
그랬어야 우리 부부가 끝까지 잘 살 수 있었을 것 같다면서 말이다.
우리커풀은 앞날이 어지럽고 두려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둘 다 정중히 거절했다. 결혼식장은 이미 잡아놓았으니 이제 와서 바꾸기 어렵고, 경제적 지원을 해주시겠다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희 힘으로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습니다.라고.
"똑같은 놈들"
혼내는 말씀인지 칭찬으로 착각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는 표정으로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고 두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똑같은 우리는 똑같은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각자 빠져나왔다.
남편 빼고는 두 누나나 동생 커플도 모두 다 성당에서 결혼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일반 예식장에서 결혼했다.
결혼 후 집안에서 왕따가 된듯한 느낌을 순간순간 견디긴 해야 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부부 주체적인 결혼생활' 은 우리 가정을 세우는 정체성이 되었다.
어머님의 장례를 치른 후 동서와 둘만의 첫 식사데이트가 있던 그 봄날(지난 화 '일주일만에 새댁이 헌댁되었네' 이야기)
멈추지 않는 눈물을 교대로 쏟아내며 우리는 점심때 만나서 저녁때를 넘기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동서의 서럽게 펑펑 쏟아내던 이야기들과 눈물진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날이 가기 전에 일단 나는 형제 부부만의
단톡 방을 만들었다. 시댁 단톡 방이 이미 있었지만 시누이들은 모두 미국에 있었고 이 단톡 방의 의미는 무척 다르다는 것을 적어도 동서와 나는 알았다.
"하이 여기서 이제 우리 자주 소통해요.
생일도 축하하고, 일주일 차이로 결혼한 우리의 결혼기념일도 챙겨주자고요호호
또 홀로 남으신 아버님 일도 수시로 상의하고요"
그리고 바로 다음날 은행에 가서 계좌 하나를 만들었다.
"이제 매달 한 집당 5만 원의 회비를 걷을게요^^
우리 형제 부부 결혼 20주년 기념일에 그 돈으로 유럽여행 가요'
2년 동안 매달 합쳐서 10만 원씩 모은다고 모두의 유럽여행경비가 되진 못한다. 하지만 이미 들뜬 마음은 파리의 노천카페에 네명이 가 앉아있었다. 행복해하는 이모콘들이 마구 날아왔다.
그 뒤 그 회비는 아버님과 정기적으로 다 같이 식사를 할 때 보조로, 그리고 나중에는 아버님 병원비 관련 일에 돈이 들 때마다 효자노릇을 했다.
그리고 작년에 함께 떠난 형제 부부의 최초의 합동 제주도 여행.(역시 유럽여행 경비로는 택도 없었던 회비)
동서의 거리낄 것 없다는 듯 터져 나오는 깔깔 자유로운 웃음소리, 내 남편이 자신의 동생과 있어서 나올 수 있는 듯한 좀 다른 종류의 행복하고 흐뭇한 미소, 형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동생의 반달 눈웃음.
21년 전 일주일 차이로 결혼식을 해치우듯 올린 우리 형제 부부의 리마인드 신혼치유여행은 즐거웠다.
과거의 상처들이 처음부터 행복으로 다시 놓여지는 멋진 복기의 시간이었다.
에필로그: 시어머니 돌아가시기 일주일전이야기
결혼 후 처음으로 마련한 우리 집은 입주하기 전 부실공사로 말이 많았다. 하자가 다 고쳐지지까지 원래 입주일보다 4개월이 더 걸렸고 우리는 짐을 컨테이너에 맡기고 오피스텔을 얻어 지내며
의식주 해결이 왜 인간의 기본 행복권인 줄 알게 되었다.
이사를 오고 난 후 기다리고 계셨던 시부모님을 가장 먼저 초대했다.
풍경이 좋은 외각 지대에 있던 우리 집 근처에서 맛있는 식사를 사드리고 집으로 모시고 와 테라스에서 봄볕을 쬐시며 드시도록 커피와 과일을 내왔다. 그리고 우리 두 아들의 첼로와 기타 합주가 시작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 두 손자가 따로 연습해서 들려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머님이 연주가 끝날 즈음 느닷없이 눈물을 터뜨리셨다.
'아이고 해준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잘 컸냐 아이고'
우리모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져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우시는 어머님을 지켜보았다. 그때는 눈물이 글썽거리기만 했는데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에야 눈물이 흘러 눈 앞이 마구 흐려진다.
왜 그런 말씀을 하고 우셨을까.
지금까지 손주를 단 한번도 봐주신적 없었던것에 대한 미안함이 불현듯 밀려오신것인가.
아니면
나와 남편에게 그동안 고생했다고 더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에둘러 칭찬과 사과를 한번에 하시는것인가.
알수없었지만 왠지 모를 아련함과 함께 질문할수없는 궁금증으로 마음이 방망질을 쳤다.
'해준 것이 왜 없으세요 어머님 아버님 늘 감사해요. (이런 훌륭한 아들을 낳아 길러주셨잖아요. 우리 아들들의 아빠로 저의 남편으로이렇게 멋지게요! 그리고 두 분 사시는 동안 의좋게 지내셨던것만으로도 남편에게 그리고 저희에게 큰 선물이었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최선의 멘트를 생각해냈다.
하지만 괄호 안에 있는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다.
그것이 우리가족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마지막 말씀이었다.
며칠 뒤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단 2분 만에(아버님의 증언에 의하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