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사례를 각색하여 서술하였습니다. >
M전무는 지독한 실적주의자였다.
영업직 하위간부에서 출발해서 임원 자리까지 올라간 그는,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였다.
좋게 말하면, 남들이 더 못하겠다고 할 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선구자였고, 한계에 왔다 싶을 때 그 한계를 깨는 사람이었다.
설산을 오르는 등반가처럼, 매출 목표를 넘어서 성장, 1등, 기록 경신의 봉우리를 줄줄이 정복하는 개척자였다.
나쁘게 보면, M전무는 너무 의욕이 넘치고,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가차없이 비난하는 스타일이었다.
후배 직원들이 조금만 더 열심해 해주면 좋을 텐데, 대강 대강 월급만 축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업직 직원들에게 쓴소리를 할 때면,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밥 먹을 때나, 회의 중에나, 잠깐 지나가다 마주친 도중에도 사사건건 업무 진행 상황을 묻고 잔소리를 덧붙였다.
이런 M전무 때문에 직원들은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아서, 밥맛이 떨어지고 회사를 떠나고 싶다고 공공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유독 M전무의 표적이 되는 직원은 T대리였다.
소위 '만년 대리'라고 할 수 있는 T대리는, M전무와 입사 동기로, 말단직원으로 입사해서 20년 동안 근속한 성실한 직원이었다.
다만 M전무와는 달리 실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고, 승진에 몇 번 미끌어졌으며, 이제는 M전무와는 하늘과 땅 차이의 직위 차이가 나게 되었다.
(어눌한 말투에, 버릇처럼 생글생글 웃는 표정의 T대리는 사람은 참 좋아 보였고, 누굴 속이거나 기싸움을 할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천성이 영업직과 잘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M전무는 T대리에게, "야, 너는 나랑 입사 동기인데 아직도 대리 밖에 안 됐냐", "일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넌 그 나이 먹고도 왜 이렇게 답답하냐", "나를 좀 본받고 배워라. 언제까지 대리로 살 거냐" 등등의 날이 선 말을 다른 직원들이 듣는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하면서 T대리를 지적했다.
M전무로부터 각종 폭언과 실적 압박 등이 자꾸 쌓이게 되자, 그러한 피해를 당했다는 직원들이 의기투합해서 회사에 고충 신고를 하였다.
관련 조사 과정에서, 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사람은 T대리라고 말했다.
M전무가 T대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옆에서 보기만 해도 T대리가 너무 안쓰럽고 화가 난다고 했다.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T대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으며, 직원들도 이런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어서 참담한 심정이었다고 했다.
피해자 조사의 마지막 단계로, 모든 직원들로부터 처절한 피해를 겪었다고 지목된 T대리를 만나 보았다.
그런데 왠일인지, T대리는 전혀 침울하거나 위축된 기색이 없었다.
예상과는 달리, T대리는 밝은 얼굴과 미소를 띠며, 명랑하게 말했다.
약간 왜소한 체격과 느린 말투, 소박한 옷차림도, 그가 무해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징표들처럼 보였을 뿐, 나약한 피해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T대리에게 M전무의 폭언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T대리의 꾸밈없어 보이는 대답은 이렇다.
"저는 M전무가 저한테 폭언을 했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M전무가 저한테 항상 잘되라고 응원해준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직원들이 어떻게 느꼈는지는 저는 잘 몰랐어요. 우리는 입사 동기니까, 동기끼리 할 수 있는 말 아닌가요? 남들은 모르는 저희만의 관계가 있는 거죠."
"저도 승진하려고 노력했는데, 영어점수가 미달되거나 이런 저런 사정이 있었어요. 절 밀어주신 분들께 죄송하죠. 그래도 제 역할은 다하려고 해요."
T대리의 인식은 자기합리화일까, 진심일까, 인지부조화일까, 대체 뭘까.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은 교훈처럼, 극악의 환경에서도 그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기 내면에서, 증오 대신 사랑을 선택하는 자유를 누린 것일까.
아무리 강한 바람도 나그네의 옷깃을 여미게 할 뿐 결국 외투를 벗기지 못했지만, 햇볕만큼은 부드럽게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지 않았나.
그처럼 T대리의 밝은 기운은 그동안 다른 수십 건의 조사를 하면서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인자하고 따스한 모습이었다.
T대리는 M전무나, M전무로부터 피해를 당했다는 직원들 모두를 뛰어넘는 그릇이 큰 사람처럼 보였다.
거센 바람같은 그 모든 언쟁들이 다 씻겨지고 잠잠해지는, 거룩하고 고요한 햇살처럼 말이다.
(가해자를 합리화하거나, 피해직원들이 속이 좁다는 건 아니다. 우리랑 똑같은 그냥 보통 사람들이다.)
매우 드물지만, 누군가는 그 내면이 산처럼 바다처럼 드넓어서, 거칠게 구르는 바위도 돌맹이도 생채기를 남기지 못하고, 다 부드러운 흙으로 물결로 잠잠하게 품어주기도 한다는 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