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사례를 각색하여 서술하였습니다. >
R사원(20대 여성)은 직속 상사인 S부장(40대 남성)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S부장이 자기 말을 잘 들어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직원으로서 할 수 있는 정당한 요구나, 회의에서 말한 아이디어를 묵살해 버린다고 했다.
또, 이것저것 부당하게 대한 일이 너무 많다고 한다. R사원이 나름대로 정리해둔 공용폴더 체계를 어느 날 갑자기 S부장이 말도 없이 마음대로 바꿔버렸다고 했다.
거래처에 가서, R사원이 "조금은 대하기 까다로운 애"라고 험담을 했다는 부분에서는 극히 분노하기도 했다.
S부장은 말했다.
R사원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고.
회사생활 15년 동안 R사원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본인의 커리어, 평판 다 포기할 수 있으니 그냥 나를 다른 부서에 보내 달라고.
도대체 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R사원은 신입사원 시절부터 의욕이 넘치는 직원이었다.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는 건 기본이고, 아무도 듣지 않는 사내교육을 찾아서 열심히 수강하고, 5년 전쯤에 생겼다가 유야무야 사라진 사내 스터디까지 다시 주도적으로 만들어서 경영 관련 책을 읽고 발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R사원의 당시 직속 상사, 그러니까 S부장 이전의 직속상사인 T팀장은 R사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시키는 일이나 열심히 하고, 어서 빨리 한사람 몫을 다해야지, 업무와 무관한 쓸데없는 데에만 열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R사원이 실수를 하면 호되게 혼내고, R사원이 성에 안찬다는 티도 팍팍 내었다.
T팀장의 꾸중과 힐난이 계속되자, R사원은 회사에 부서를 바꿔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특이하게 R사원은, S부장을 콕 집어서 S부장의 부서에 배치해달라고 요구했다.
평소 직원들에게 온화하게 대하고, 일처리도 깔끔한 S부장을 남몰래 눈여겨 보고 있던 것이었다. (다른 직원들도 S부장을 존경하고 잘 따랐다.)
R사원은 S부장에게 종종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업무나 회사생활에 대한 조언도 구하였고, 그 때마다 따뜻하고 유용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R사원은 내심 S부장을 본인의 멘토로 여기고 있었고, S부장과 함께라면 어떤 일이든 다 헤쳐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R사원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S부장도 모르는 사이에 R사원은 S부장의 부서로 옮겨왔다.
S부장은 R사원이 옆부서에서 T팀장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꼭 특정해서 S부장의 부서로 오고 싶어 했다는 사실까지는(그리고, 좋은 상사로서 S부장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S부장은 R사원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환대했고, 함께 업무를 시작했다.
R사원은 S부장의 말에 잘 따랐다. 업무 이메일에 답장도 빨랐고, 약속시간도 잘 지켰다.
하지만 S부장도, R사원이 점점 불편해졌다.
R사원은 다른 업무를 할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유독 거래처와 업무를 할 때면 본인만의 기준을 중시했고, 회사의 기존 업무처리 방식을 잘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S부장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어르고 달래도 보았지만, R사원은 회사의 케케묵은 방식은 업무에 족쇄가 된다고 생각했고, 본인이 그걸 새롭게 바꾸고 개선해 주고 있다고 믿었다.
R사원의 해명에 그럴듯한 부분도 있었고, 그동안에는 별다른 큰 문제가 없어서, S부장도 그냥 젊은 직원의 패기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그러다 결국 S부장도, T팀장처럼 폭발하고 말았다.
어느 날 R사원이 거래처와 자기 멋대로 일처리 방식을 협의해 버려서, S부장은 꾹꾹 참았던 화를 터트려 버리고 말았다.
R사원을 회의실로 따로 불러서 멋대로 업무처리하는 걸 단호하게 지적하였고, R사원은 그 시간 내내 펑펑 서럽게 울었다.
그 날 S부장은 R사원에게 저녁을 사주었고, 다시 R사원을 달래주었다.
따뜻한 식사를 나누면서, R사원의 앙금은 풀어진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S부장에게는.)
S부장에게 크게 실망한 탓일까. 그 이후부터 R사원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S부장을 존경하는 태도로 빠릿빠릿하게 일하는 모습은 사라졌다.
그러면서 S부장이 사소한 지적을 하거나, S부장의 지시가 조금이라도 불합리하게 느껴지면, 이를 가슴 속에 담아 두고 있다가 퇴근시간 이후 저녁이나 밤 중에 갑자기 S부장에게 연락을 해서 따지기 시작했다.
10분이고 30분이고 길어지도록 전화를 했다.
1시간 넘게 장문의 카카오톡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혼자서 감정에 복받혀 울기도 했다.
이런 날들이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S부장은 처음에는 당황스러워서 R사원을 다독이고, 미안하다고도 하고,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고도 했다.
R사원의 말을 잘 들어주려고 애썼고, 이제는 더 이상 R사원의 업무처리 방식에 충고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R사원은 S부장의 모든 행동들, 일거수일투족 속에서 하나하나 다 본인의 기준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찾아내어 따져묻고 사과를 요구했다.
S부장은 R사원을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대면조차 하지 않으려 하였다.
S부장은 자기가 직장 상사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게 맞는지 되물었다.
R사원이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이렇게 행동하는지, 혹시 여기에 작용하는 어떠한 R사원에게 내재된 상처가 있는 것인지 규명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지만, 나 역시도 R사원의 태도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읽었던가, 오래 전 어떤 대장부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바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은혜를 베푼 사내를 위해 기꺼이 대신 죽음을 맞이하며,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
R사원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목숨도 바치겠다"는 태도였을까.
하지만 R사원의 모든 면을 한결같이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R사원이 선망했던 인격자 S부장마저도 말이다.
R사원 특유의 열정과 독단적인 업무처리는,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는" 행동과도 거리가 멀었고 말이다.
다시금 생각한다.
인격적인 대우와 배려는, 무례한 사람의 상처로 인해 쉽게 파괴될 수도 있다고.
인격적인 대우와 배려는 잘 정돈된 아름다운 정원과 같은 것이어서, 그 찬란함에 상응하여 가꾸어주면 더욱 멋진 꽃과 나무들로 무성해 질 수 있지만, 누군가가 함부로 화단을 망치고 오물을 끼얹으면 쓰레기장만도 못하게 된다.
짧게 말하면, 경제학에서 흔히 말하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 즉 나쁜 것들이 좋은 것들을 몰아낸다는 말과도 통할 것 같다.
R사원으로 인해, S부장은 인간에 대한 신뢰마저도 다 잃었을 지도 모른다.
다시는 직원들에게 자상하고 따뜻한 선배가 아닌, T팀장처럼 뾰족하고 차가운 상사로 돌변할 지도 모른다.
S부장의 단아했던 정원이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다른 직원들이 좋아했던 S부장의 모습이, 내면의 상흔 없이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