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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한 새벽빛 Feb 25. 2016

언행일치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문학 시간 교재에 나왔던, 문제에 달린 짧은 보기 지문이다.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비슷하게 적었다.

포도밭을 갈아야 하는데 이제는 늙어서 할 수 없게 된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찾아 갔다. 첫째는 귀찮아서 "싫어요!" 하며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러다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저녁에 밭으로 가서 밭을 갈았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갔다. 둘째는 밭에 갈 생각이 없었지만 "네, 아버지. 그렇게 할 게요."라고 대답했고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밭에 가 보니 포도밭이 다 갈려 있었다.

이 지문이 달려 있었던 문제 자체는 전혀 다른 것이었는데, 선생님께서 "누가 더 잘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셨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당신은 누가 더 잘했다고 생각하는가?




"첫째 아들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둘 다 잘못한 것 같은데,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그래도 밭을 갈았던 첫째가 더 낫다고 생각해서 손을 들었다. 그랬는데 교실에서 나만 외롭게 손을 들고 있었다. 뒤를 돌아 보니까 친구들이 당연히 둘째 아들이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어 보았다.


"왜??"


"아버지 기분이 안 상하셨잖아."


"거짓말이었잖아."


"그래도. 아버지가 안심할 수 있었잖아."


아. 친구들은 아버지의 기분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구나. 상대방의 입장을 더 생각하는구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둘 다 잘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정직함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감정을 티 냈다. 첫째 아들이랑 똑같았던 셈이다. 본심은 그렇지 않지만 그 순간의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하고 나중에라도 반성하고 행동을 고친 첫째 아들을 나는 옹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위선과 위악이라면 그나마 솔직한 위악이 더 나은 것 아닌가에 대한 고민을 고등학교 1학년 때도 했었는데, 나는 그 고민에 대한 답을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등장하는 수녀님인 모니카 고모에게서 얻을 수 있었다.


P.158 모니카 고모의 말
"목사나 신부나 수녀나 스님이나 선생이나 아무튼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위선자들 참 많아. 어쩌면 내가 그 대표적인 인물일지도 모르지......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의식하든 안 하든 말야. 그래서 고모는 그런 사람들 안 싫어해. 죽는 날까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생각해.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어느 정도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보다 더 교만하고 더 가엾어....."


그 가엾은 위악자가 바로 나여서 나는 이 문장을 연필로 옮겨 써 두었었다. 나는 내 행동이 위악이 아니라 솔직함이라고 생각했었다. 언행일치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리화했던 것이다. 위선을 떨기가 싫었다. 첫째 아들처럼 차라리 반성을 하고 마음이 내키는 진짜 선을 행하고 싶었다.


선생님은 무엇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넘어 가셨다. 나는 나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영 찜찜했다. 이후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종종 그 두가지 관점 모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질문을 하면 다들 꼭 한 명이 더 옳다고 말할 수 없다는 답을 내었다.


그러다 7년 가까이 지난 2015년의 어느 날, 엄마와 식사 후에 모처럼 식탁에서 대화를 하다가 엄마한테 같은 이야기와 같은 질문을 했었는데 들어 보시더니 "어, 이거 성경에 나오는 건데!" 하셨다. (엄마는 나름 독실한 크리스천이시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당장 그것을 찾아 보았다.


마태복음 21장 28-32절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않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성격 속의 맏아들이 지문에서는 둘째 아들이고, 둘째 아들이 지문에서는 첫째 아들이었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성경에서 따 와서 만든 지문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성경에 나온 아버지의 뜻대로 한 사람은 누구냐는 물음은 누가 밭을 갈았냐는 뜻이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이 밭을 갈았으면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학 선생님의 물음과는 조금 다르지만, 당연히 아버지의 뜻대로 한 아들이 잘한 것이겠지.


"니가 한 이야기에서는 첫째 아들이 잘했겠네. 뉘우쳤다고 되어 있잖아."


나는 첫째 아들의 태도와 상대방의 기분에 대한 부분도 설명했다. 그랬더니 엄마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하셨어."


내가 어린 시절부터 엄마를 따라 교회를 다녔었기 때문에 걸림 없이 받아들이는 문장일 수도 있다. 나는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두 아들 모두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다고 보지만, 성경이 나에게 이렇게 명쾌한 답을 줄지 몰랐다.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문에서 첫째 아들이 좀 과격하긴 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진실되게 행동을 하면, 처음에는 아버지를 실망시켰다가도 다시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이면 더 좋겠다.) 나는 첫째 아들처럼 뉘우치고 행동하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이번 글이 종교적이라며 불편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정치적인 이야기가 싫다는 사람에게도 세상에 정치가 아닌 것이 어디있냐고 이야기합니다. 종교를 가졌다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해서 의미를 더럽힐 뿐, 세상 이치를 다루는 것이 종교다 보니 우리 삶이 종교적인 지향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작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교회가 익숙하니까) 굳이 말하면 기독교..? 성경은 가끔 읽습니다. 모든 종교에 대해서 어느 쪽이 그릇된 것이 아니라 모두 일맥상통한 참과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느 종교 종파만 맞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종교가 갖는 참뜻조차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제가 교회에 안 나온다고 저를 불쌍히 여기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엄마와 가장 많이 부딪혔던 부분입니다. 저는 아침잠이 굉장히 많아서 늦잠을 자고 싶은데 어린이 예배는 9시였습니다. 어쩌다 교회에 빠지기라도 하면 호랑이로 돌변하는 어른들 모습에 질려서 교회를 아예 안 가게 되었습니다.


친구관계 문제로 힘들고 우울해서 엄마에게 힘든 소리를 하면 돌아오는 말은 "교회를 안 다니니까 그렇잖아!"라는 꾸중이었습니다. 나도 교회를 다녀봐서 알지만 교회에 다닌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엄마가 진짜 말씀대로 산다면 나를 그냥 안아줬어야 했습니다.


엄마도 엄마 코가 석자여서 그랬다는 것을 지금은 압니다. 엄마 때문에 저는 기독교인을 싫어하는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는데, 마음빼기를 하다보니 저절로 엄마를 비롯한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종교인들을 미워하는 마음마저 없어졌습니다. 맹목적이라는 것도 저의 시각이고, 엄마는 그저 말씀이 생명임을 알고 나름대로 살기 위한 발버둥을 치고 계셨을 뿐이었습니다.


기도하면 이뤄지기는 합니다. 아홉 살 때였나, 교회에서 기도에 대해 배워서 저도 기도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 아빠를 미워하고 있었던 저는 그 마음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서 하나님께 "아빠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로 아빠가 예전만큼 미워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고 어린 나이에 했던 기도가 저도 참 갸륵한데, 그때 확신했던 것은 하나님은 진짜로 계시기 때문에 내가 마음으로 믿고 기도하면 다 이뤄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을 얻게 해달라는 기도는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무조건 다녀야 한다는 사람과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의 마음 속에 계시니까 교회를 안 간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말로만 주여, 주여 했지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자기식대로의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종교가 다 이단이고 사이비겠죠.)


내가 종교를 가진다면 차라리 성당엘 가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어릴 때부터 다녀서 그런지 교회가 익숙하기는 했습니다. 대학 때 힘들어서 다시 찾았던 교회에서 처음으로 '나를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 귀에 들어 왔습니다. 나는 내가 행복해지고 싶어서 왔는데 왜 나를 버리라고 하지? 내가 낸데, 하는 마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원죄 자체인 나를 다 비우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짐이 결국 진짜 나다워지는 일임을 깨닫고 나를 힘들게 하던 인간적인 생각들을 떨쳐버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기쁨을 누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언제나 기도는 감사기도와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해주세요."가 전부였습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그것을 이겨낼 힘을 달라고 하고, 미운 사람이 있으면 그를 포용할 수 있는 큰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를 다 버리고 싶다는 기도를 한 지 한 달만에 마음수련 명상을 만났습니다. 나를 다 버릴 수 있는 방법이니까 저에게는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버리면서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었지만, 노력해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만 해도 또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화가 치미니까 예민하게 굴게 되고 내 마음과는 달리 다투게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관련된 기억된 생각들과 그 순간의 감정을 들고 있는 자기의 상들을 한 걸음 떨어져서 돌아보고 버리고 나니까, 지금은 그 사람도 예뻐 보입니다. 미운 소리를 해도 예전의 것들과 묶어서 곱절로 상처 받지 않고 퉁명스로운 말투 저편에 있는 지금 이 순간 상대의 감정을 알아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금방 가능했던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간결하고 체계적이어서 기가 막힌 마음수련 명상의 과정별 방법대로 인내심을 가지고 양파 껍질 같이 겹겹이 쌓여 있는 내 마음을 벗기고 벗기고 벗겨보니까, 끝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외웠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던 성경 말씀들이 문득 떠오르면서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니 모든 종교인들에게 마음수련을 권하고 싶은 마음마저 듭니다.


그렇지만 마음수련은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 마음수련이 종교라면 삶 자체가 종교일 것입니다. 마음수련이 종교인 줄 아는 사람은 명상을 하러 와서도 마음을 버리지는 않고 어떤 가르침이나 위안을 얻으려다가 관두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마음수련 명상은 '마음을 버리는 방법'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명상을 하시는 분들의 의견도 갈립니다.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이 대다수인데 종교라고 생각하는 분도 가끔 보게 됩니다. 아마 그분들이 가진 종교에 관한 정의가 다르겠지요.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수련의 실체입니다.


당신이 마음수련 명상을 똥이라고 하면 똥이고, 된장이라고 하면 된장일 것입니다. 그러나 된장을 가지고 똥이라고 하면 그나마 다행이고 이해도 되는데, 금덩이가 똥으로 보인다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안타깝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더구나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누군가 한 말만 믿고 냄새 난다고 도망가는 사람은 더 이상합니다. 실체가 뭔지, 똥인지 된장인지는 먹어 보면 압니다. 진짜 똥일지언정 맛을 본다고 죽지는 않아요.


마음수련 명상을 만드신 분의 의도(http://www.woomyung.com)와 같이, 누구든지 이 명상을 몰라서 못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것과 언젠가는 모두가 이 명상을 무료로 공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전 세계 국가, 인종,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명상을 끝까지 하신 많은 분들의 공통된 바람이자 꿈입니다.


제 생각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실제로 많은 공격 아닌 공격을 받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으며 그것을 믿기 때문에, 저는 마음수련에 대한 오해를 하시는 분들께 이것이 금덩이라고 괜히 공을 들여 설득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당신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며 여유 있게 이 사랑스러운 똥을 뒤집어 쓰고 눈 앞을 지나가렵니다. 


실제로 제 마음의 밭에 아주 멋진 거름이라, 아예 그냥 토양의 질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위악도 위선도 아닌, 제가 그토록 바랐던 언행일치의 삶에 좀 더 가까워졌거든요. 그전에는 내 감정도 내 마음대로 못 해서 평소에는 그저 꾹꾹 참고 눌러 놨다가 엉뚱한 데서 발끈하곤 했는데 이제는 좋을 때는 좋다고 하고 싫을 때는 싫다고 하되, 정직함에 대한 강박을 내려 놓고 상대방을 위한 하얀 거짓말도 조금은 할 수 있고, 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건강하게 화를 낼 줄도 압니다.




아차, 제 글은 똥이 확실합니다. 제 마음의 똥. 저는 무지무지 시원하네요. ^^


하하. 오늘도 식사 중이 아니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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