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쓰는 글_
내 생애 첫 권력의 맛을 본 건 2015년, 대한민국 전역이 노란색 봉지에 미쳐있던 허니버터칩 광풍의 한복판이었다. 당시 나는 세상에 하나뿐인 천상의 달콤함과 짭짤함을 하사하는, 그야말로 절대 군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평소 연락 한 통 없던 친구가 갑자기 안부를 물으며 구차한 읍소를 늘어놓고, 기세등등하던 손님들조차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과자의 행방을 묻던 기묘한 시절이었다.
창고 깊숙한 곳에 숨겨둔 박스는 단순한 과자 뭉치가 아니라, 내 권력을 상징하는 ‘바삭거리는 금괴’였다. 나는 그것을 누구에게 분배할지 결정하는 유일하고도 엄격한 집행관이 되었다. 매대 밑에 감춰둔 그 노란 봉투 하나를 슬쩍 꺼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나와 손님 사이를 흐르는 공기의 밀도를 단숨에 바꿔놓을 수 있었다.
“사장님, 저 사장님만 믿고 온 거 아시죠?”
평소엔 위풍당당하던 손님들이 내뿜는 간드러진 알랑방구와, 평소보다 과하게 정중해진 인사말은 마치 내 권좌 앞에 바쳐지는 경건한 조공처럼 느껴졌다. 노란 봉투 하나로 누군가를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부모로 등극시킬 수도, 혹은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발길을 돌리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 그 권력이 주는 묘한 전율에 취해, 나는 카운터 뒤에서 은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권력이 주는 짜릿함에 비해 그 대가는 비정했다. 아이 생일이라며 매달리는 단골에게 한 박스를 통째로 하사하는 성은을 베풀었으나, 다음번에 구해주지 못하자 그는 고마움 대신 배신감을 품고 발길을 끊어버렸다. 달콤한 권력의 정점 뒤엔 늘 인간관계의 씁쓸함이 공존한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뼈아프게 배웠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2026년 현재, 나는 10년 만에 다시금 그 은밀한 권좌에 올랐다.
이번 권력의 핵심은 더 이상 달콤한 감자칩이 아니다. 이란과 미국 전쟁의 여파로 봉투의 원재료인 나프타가 귀해지자, 대한민국에 때아닌 ‘쓰레기봉투 원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평소의 마트 주인이 손님의 편의를 돕는 친절한 조력자였다면, 이런 국가적 품귀 사태 속의 나는 냉혹한 관상가이자 집행관으로 전격 변신한다. 내가 이 은밀한 권력의 맛을 음미하는 명분은 단 하나다. 이 귀한 봉투가 탐욕스러운 사재기꾼의 창고가 아닌, 당장 오늘이 급한 진실한 이웃의 손에 공평하게 쥐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카운터라는 왕좌에 앉아 내려다보면 이제 손님들의 속내가 훤히 보인다. 아파트 주민인 척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오지만, 눈빛부터 미묘하게 흔들린다. 처음 마주하는 경계심과 ‘과연 이 자가 나에게 봉투를 내어줄 것인가’ 하는 확신 없는 간절함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치밀한 위장 전술까지 등장한다. 뒷문은 주민들이, 앞문은 외지인이 주로 이용한다는 점을 간파한 원정대들이 분리수거 박스까지 든 채 뒷문으로 당당히 들어온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 자리를 10년 넘게 지켜온 내 선구안은 결코 속일 수 없다. 처음 보는 얼굴, 초점 잃은 표정, 그리고 너무나 깨끗한 분리수거 박스. 딱 봐도 견적이 나온다. ‘당신, 우리 동네 사람 아니잖아.’
손님들의 읍소 또한 각양각색의 시나리오가 되어 쏟아진다. 장거리 파부터 다둥이 호소파까지, 그들은 나의 공정심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하지만 쓰레기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이 ‘성스러운 비닐’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철저히 선별하고 엄격히 분배한다.
과거의 허니버터칩이 세상을 홀리는 천상의 맛이었다면, 지금 이 돌돌 말린 비닐 뭉치는 임금의 엄중한 어명이 적힌 교지(敎旨)나 다름없다. 이 뭉치 하나를 손에 쥐여줌으로써, 그 어떤 오물이라도 당당하게 문밖에 내놓을 수 있는 면죄부를 하사하는 것이다. 평소엔 손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친절한 사장이지만, 10년 만에 찾아온 막중한 권력 앞에서 나는 오늘도 즐겁게 관상을 보며 정의로운 집행관이 되기를 자처한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새옹지마의 연속이다. 물자가 귀해진 난세가 오니, 평소의 갑을은 온데간데없고 고작 비닐 한 장이 권력을 쥔다.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과자 소동처럼, 이 초록색 비닐도 결국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짧은 소동을 빌려 평소 우리 마트를 지켜준 이웃들에게 진심 어린 보답을 건넬 수 있다면, 이 또한 근사한 삶의 역설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