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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이야기 6

용서의 종류와 용서에 얽힌 오해

  -용서의 종류

  학자들의 연구문헌에서는 다양한 용서들이 나타나고 있다. 열거해보면 ‘일방적 용서’와 ‘쌍방적 용서’ ‘유사용서’ ‘거짓용서’ ‘성급한 용서’ ‘진정한(바른) 용서’ ‘완전한 용서’ ‘머리로 한 용서’ ‘가슴으로 한 용서’ ‘결정의 용서’ ‘정서적 용서’등이다. 용서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용어들을 살펴보는 것도 용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 한다. 


  먼저 ‘일방적 용서’는 ‘쌍방적 용서’에 대립되는 말로 가해자 참여없이 개인내적 심리적으로 용서과정을 거쳐 용서가 되는 것을 말한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용서과정에 참여하지 않아도 가능한 용서이다. 이 일방적 용서에서는 용서를 한 뒤 가해자와 화해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화해를 하지 않는 경우란 가해자가 원하지 않거나, 가해자가 전혀 반성하지 않아서 또 다시 가해의 상황이 있을 경우이다. 물론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피해자는 가해자와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쌍방적 용서’는 개인 간에 발생하는 관계적인 용서이다. 가해자는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며 피해자의 치료과정을 돕는다. 쌍방적 용서에서는 화해가 당연한 귀결이다.


  ‘유사용서’ ‘거짓용서’ ‘성급한 용서’는 잘못된 용서로서 ‘진정한(바른)용서’, 완전한 용서와 대칭을 이루는 용어이다. 유사용서란 앞에서 얘기했듯 용서와 비슷해 보이나 용서가 아닌 것으로 잊어버리는 것, 죄에 대한 사면, 가해자를 변명해 주는 것, 상대방 행동을 묵인하는 것,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 시간이 흘러서 상처로 인해 생긴 분노가 줄어드는 것, 덮어두기 같은 것이 해당된다.


   ‘거짓용서’란 역시 앞에서 얘기했듯 용서를 하지 않고서도 용서를 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심리적 방어의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흔한 형태가 반동형성이고 그 밖에 투사, 부인 같은 것이 있다. 


  ‘성급한 용서’란 치유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용서, 즉 자기존중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한 용서를 말한다고 했다. 악행을 기억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충분히 경험하면서 분노하고 상실을 아파하는 애통의 과정인 자기존중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 용서는 성급한 용서로 상처가 재발할 수 있고 진정한(바른)용서, 완전한 용서가 주는 여러 차원의 유익을 얻기가 어렵다. 


  ‘진정한(바른)용서’, 완전한 용서는 악행을 기억하고 부정적인 모든 감정을 겪는 애통의 과정을 거친 뒤 공감이나 가해자에 대한 측은지심, 인지적 재해석, 상처수용 같은 용서전략을 사용해서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씻어낼뿐더러 가해자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갖고 화해의 길을 열어두는 용서를 의미한다.


  ‘머리로 한 용서’란 ‘가슴으로 한 용서’와 대칭되는 말로 ‘결정의 용서’와 같은 의미이다. 같은 맥락에서 ‘결정의 용서’는 ‘정서적 용서’와 대칭되는 말로 정서적 용서는 ‘가슴으로 한 용서’와 같은 의미이다. 머리로 한 용서 곧 결정의 용서란 상처를 받으면서 용서할 것을 선택하는 용서이다. 이러한 결정의 용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것은 마치 독이 온 몸으로 퍼지지 못하게 하는 응급처치와 같다. 즉 부정적인 감정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결정의 용서를 잘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결정의 용서는 진정한(바른)용서로 나아가는 하나의 선택이며, 이 결정의 용서를 함으로써 즉 용서하겠다고 결정함으로써 용서의 과정을 거쳐서 참되고 나아가서 완전한 용서를 이루어낼 수 있다. ‘정서적 용서’와 ‘가슴으로 한 용서’, ‘진정한(바른)용서’, 완전한 용서는 같은 의미이다. 이러한 용서는 인지적, 정서적, 행동적, 영적으로 완전히 용서가 된 상태이다. 


-용서에 얽힌 오해

  상처를 입은 사람이 용서를 선택하는 것을 주저하게 하는 이유는 용서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고 용서를 다른, 용서와 유사해 보이는 것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그 중 대표적인 오해가 용서하면 가해자와 화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가해자의 얼굴도 보기싫고 가해자만 떠올려도 경기가 나게 싫은데 화해하라고 하니 용서를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건 가해자만 좋게 해주는 일 같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결코 할 수 없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는 별개의 문제이다. 용서한다고 해서 꼭 화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화해란 갈등으로 인하여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는 것인데 용서한다고 해도 원하지 않으면 화해하지 않아도 된다. 용서함으로써 그저 나만 상처의 감옥에 갇히지 않으면 된다.


  다음으로 많이 오해하는 것이 용서를 사면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사면은 죄를 사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죄를 사해주는 것이 용서라고 생각하면 대개의 피해자들 반응은 내가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나 용서를 해준다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고 좀 부당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내가 용서해주고 어쩌고 하는 것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그 치유를 위해 부모용서하기를 권하면 나타나는 반응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용서하니 마니 하겠느냐는 것이다. 


  용서를 사면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이다. 사면은 신만이 내릴 수 있거나 혹은 범법자에게 내려지는 법의 관용이다. 그러니 사면은 용서와 다른 차원이다.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다고 해서 가해자가 죄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다른 문제이다. 용서는 피해자의 내적 심리적인 해결을 위한 작업이다. 가해자의 죄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남아있다. 내가 용서한다고 해서 그의 죄가 사면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면 가해자의 가해행위를 그대로 참고 견뎌야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혹은 가해자가 가해를 통해 나에게 준 암묵적인 메시지인 ‘너는 가치없는 존재이다.’ 라는 메시지를 그대로 수용해야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낮은 자아존중감을 가져야 하고 가해로 인해 형성된 정체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결단코 용서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계속 가해상황에 처해도 막을 힘이 없고 상처받는 자아존중감을 회복할 길이 없다. 그나마 분노함으로써 어느정도 자신을 지킬 수 있지만 지속적이고 만성적인 분노는 나의 몸과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한다. 진정한 바른 용서가 답이다. 용서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치유가 되어 자아존중감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강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용서란 약자가 하는 행동이라는 믿음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이 역시도 정 반대이다. 약자는 가해상황에서 계속 참고 견디면서 당하기만 한다. 이렇게 참고 견디는 것을 용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서는 약자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 가해상황을 참고 견디거나 가해를 묻어두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용서란 악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분노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아닌,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의 관계로. 용서는 용기 없이는 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강한 자만이 용기를 가질 수 있고 그래서 용서는 강자가 선택하는, 가해자의 인간적인 부족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가해상황에 대한 하나의 적극적인 해결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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