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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 학 씨! 너, 뭐 돼?

더블 중간고사를 지켜보는 엄마의 혼잣말

by 햇살 드는 방

처음이다. 우리 집 고 자매가 동시에 중간고사를 준비하고, 치르는 게. 중 2인 둘째가 인생 첫 중간고사를 치르게 되면서 처음으로 수험생 아닌 '시험생'이 둘인 시험 기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래서일까 시험 준비한다고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두 배로 안쓰럽다. 사실 학생이 공부를 하는 게 안쓰러울 일은 아닌데, 내 딸들이 잠을 줄이고 스트레스받아가며 공부하는 모습은 대견함 반 안쓰러움 반이다. 시험 대비 특강과 직보로 이 학원, 저 학원 불려 다니고 집에 와서도 늦게까지 잠 못 자고 공부하는 나날. 큰 아이는 진작에 심한 몸살을 동반한 후두염으로 고생을 했고, 둘째까지 감기가 올까 봐 노심초사하며 지켜본다.


"겉옷 챙겼어? 오늘 춥다는데?"

"따뜻한 물 마셨어?"

"비타민 먹을래?"

"밥은?"

"내일 몇 시에 깨워줄까?"


먹고, 마시고, 자는 ‘생존 3종 세트’ 말고는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엄마는 '질문봇'이 되어 아이들 곁을 서성인다. 이것도 딸들이 집에 있을 때나 가능하지 학교, 학원, 스터디 카페를 오간다고 바빠 얼굴 보기 힘든 요즘, 제대로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다. 평소라면 수업을 마치고 나온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줬을 딸들이 아무도 집에 없는 밤. 신랑도 귀가가 늦어 덩그러니 혼자 있는 밤엔 집안 가득한 적막이 어색해 괜히 운동화를 신고 걸으러 나간 적도 여러 번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늦은 밤까지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은 괜스레 허전하고 적적하게 느껴졌다. 글쓰기엔 참 좋은 조건인데, 수업을 마치고 미련없이 덮고 나온 노트북을 다시 열게 되지는 않더라.


사실 우리 집 시험 기간이 늘 이렇게 고요하고, 적막하고, 애틋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피곤함과 스트레스로 한껏 예민해진 딸들 사이에 자꾸만 불꽃이 튀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상호 접근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동생을 위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문제집을 골라주던 다정한 언니도 언니와 밤새 수다 떠는 재미에 바닥에 요를 깔고 같이 자던 동생도 시험 기간에는 자취를 감춘다.


"얘는 왜 드라이기를 쓰고 제 자리에 안 갖다 놔?"

"엄마, 언니는 왜 자꾸 나한테만 짜증을 내?"

누구 들으라고 외치는 혼잣말과 누구 안 들리게 외치는 민원 사이에서 평화의 수호자가 되어 열심히 중재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나 또한 어금니를 꽉 깨물게 되는 나날들.

'하.......... 증근그스 느 끈느그믄 흐르.'

(중간고사 너 끝나기만 해라.)


그러다 어제는 결국 둘째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원인 제공자는 엄마. 5월 1일 동시에 시험이 끝나는 딸들에게 시험 끝나는 날 특별한 약속 없으면 엄마, 아빠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한 게 화근이었다. 시작은 평화로웠다. 시험 기간 내내 잠이 부족한 고등학생 언니는 시험 끝난 당일은 친구들이랑 놀기보다는 집에서 한숨 푹 자고 엄마, 아빠랑 맛있는 걸 먹으러 가겠다고 했다. 언니의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인생 첫 시험을 치르는 우리 중 2 아가씨는 친구들과 시험 뒤풀이가 있다고 한다. 홍대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사진도 찍으며 신나게 놀 계획이 이미 다 세워져 있는 듯했다. 그래, 첫 시험이니까 뒤풀이도 성대하게 즐기고 싶겠지. 여기까진 아무 문제없었다. 큰 딸을 위한 메뉴는 '훠궈'로 정해졌다. 뭐 먹고 싶냐는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훠궈'라는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래, 좋다. 훠궈 먹자!"


일사천리로 정하고 뒤돌아 설거지를 하는데 어쩐지 뒤통수가 싸하다. 아뿔싸! 둘째도 얼마 전부터 계속 훠궈, 샤부샤부 노래를 불렀었는데.... 섭섭했으려나? 이 타이밍에 모처럼 일찍 들어온 아빠는 둘째 방바닥에 마대질을 하다가 조언(이라 쓰고 잔소리라 읽는)을 시전 한다.

"바닥이랑 침대에 물건이 왜 이렇게 많아? 다 어디 있던 물건들이야? 넣을 곳이 없어?"

아....... 여보...... 이 타이밍에 당신은 또 청소가 중허구려.... 이 깔끔한 양반아... 내 나름 둘째 편을 들어줄 요량으로 한마디 덧붙인다.

"요즘 방이 많이 지저분하긴 해, 그렇지? 시험 끝나면 치우겠지~ 하핫."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둘째 얼굴을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온통 눈물범벅이다. 역시나 올게 왔구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방으로 들어가 서러움을 쏟아내는 둘째.

"다들 나한테만 뭐라고 하지! 내 얘긴 들어주지도 않으면서!나도 훠궈 먹고 싶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많이 서러웠나 보다. 안방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흐느껴 운다. 그 와중에 아빠랑 언니한테 들릴까 봐 목소리는 최대한 줄여서 울고 있는 너의 몸에 베인 '눈치보기'가 웃기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사실 둘째는 매일 먹고 싶은 게 떠오르는 아이다. 힘든 날엔 힘들어서, 좋은 날엔 좋아서, 기분이 좋아도 좋지 않아도 늘 먹고 싶은 게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제일 행복해 보이는 아이다. 그래서 먹고 싶다고 하는 건 대부분 다 챙겨주는 편인데 솔직히 최근엔 둘째의 요구사항이 계속 뒷전으로 밀렸었다. 고2 언니의 컨디션 조절이 1순위였기 때문이다. 내신의 중요도가 다르니 어쩔 수 없어, 네가 양보하렴이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둘째도 내심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훠궈를 먹으러 가자는 둘째에게 언니 아픈데 우리끼리 무슨 훠궈냐며 눈을 흘겼고, 그럼 집 앞에 샤부샤부라도 먹으러 가자는 말에 언니 공부한다고 종일 나가서 고생하니 우리도 그냥 집에서 먹자고 했다. 그럴 때마다 둘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랬다. 서운했을 텐데 언니가 우선인 상황을 머리로는 이해하니 마음도 꾹꾹 눌러 참고 있었나 보다. 그러다 결국 그 마음이 터져버렸다. 훠궈, 그까이게 뭐길래! 중간고사 학 씨! 그게 뭐길래! 둘째는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서럽게 한참을 울었다.


그러나 이 모든 에피소드도 내게는 그저 감사함이다. 공부? 그거 왜 해야 되는데? 어차피 망했어! 나 포기할래. 중학교 내내 큰 아이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저 아이는 정말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걸까? 그럴 리 없다. 공부도 학교 생활도 잘 해내고 싶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을까. 해도 잘 되지 않는 것 같으니, 시험을 망치는 걸 실패라고 생각하니 실패 앞에 상처받고 무너져 내릴까 봐 노력해 보려다가도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니 자꾸 주저앉았던 것이다. 공부가 안 되어 있어서, 첫날 시험을 망쳐서, 어차피 해도 안될 것 같아서..... 다양한 이유로 큰 아이는 시험이라는 허들 앞에서 자꾸만 드러누웠다. 전력질주를 하는 것 같다가도 눈앞에 장애물이 가까워질수록 불안에 발목 잡히고, 두려움의 돌부리에 넘어지고 쓰러졌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내 가슴도 답답함과 안타까움에 까맣게 타들어간 시간이었다.


그랬던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많이 달라졌다. 중학교 때 놓치고 건너뛴 구멍을 1년 만에 메꾸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성실히 고등 생활을 해나가며 아이가 조금씩 단단해지고 여물어 가는 것이 보인다. 여전히 매일이 불안과의 전쟁이고 자신과의 싸움이지만 어쨌든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아이가 대견할 뿐이다. 성적은 부차적인 거다. 따라오면 좋고, 안 따라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이 노력의 시간들은 아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앞으로의 삶에 밑거름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니의 시행착오를 오롯이 지켜본 둘째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알아서 야무지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첫 시험이니 실수 없이 잘 마무리하기만 해도 성공이지만, 열심히 한만큼 후회 없는 결과를 받아 들기를 바라며 큰 아이 때와는 사뭇 다른 덤덤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응원하는 중이다. 늘 언니의 반도 챙겨주지 못하고 그저 귀여워만 하며 키운 것 같은데 알아서 잘 자라는 둘째가 참 많이 고맙고, 대견하다. 시험 끝나면 샤부샤부? 훠궈? 당장 먹으러 가자! 무한리필 문 닫을 때까지 신나게 먹고 오자!!


중간고사. 벚꽃 시즌에 시작되어 연휴 직전까지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너! 4월이 왜 잔인한 계절이겠어. 네가 있어서 아니겠니? 이제 곧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인데, 성적표 받는 날엔 여왕다운 너그러움으로 우리 모두 활짝 좀 웃게 해 주면 안 되겠니? 어디 하소연할 곳 없는, 더블 중간고사 시험생을 둔 엄마는 괜히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는 ‘중간고사’ 그 녀석 멱살을 잡고는 흔들어 본다. 그러다가도 아차 싶어 꽉 쥐었던 주먹을 급하게 놓는다. 중간고사 너, 나한테 삐지면 안 된다? 화를 내려거든 나한테 내! 애들한테 화풀이하면 그땐 내가 진짜 너……


중간고사 학 씨!! 그게 뭐길래!!
시험 하아아아악씨!! 너, 뭐 돼?


나, 마이 힘들었나 보다. 시험 끝날 때가 다가오니 별 희한한 혼잣말을 다 하게 되는 싱거운 아침이다. 오늘은 애들 보내고 곧장 카페로 달려갈 거다. 1년에 딱 한 번, 휘핑크림 듬뿍 얹은 달달한 커피 큰 잔 가득 마시는 날, 그날이 오늘이다.

“여기 샷 추가에 휘핑크림 따따블이요!” 이미지는 pixabay에서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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