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이 준 무한대의 위로, 그리고 다시 시작
그리운 날은 그림을 그리고
쓸쓸한 날은 음악을 들었다
- 사는 법, 나태주 中 -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머릿속은 복잡한데 마음은 공허한 날.
아무도 떠난 이 없는데 혼자서만 텅 빈 듯 쓸쓸한 날.
시작한 일 무엇 하나 제대로 끝맺음되지 않아
조바심의 크기만 속절없이 자라는 날.
따뜻한 라테 한 잔마저도 싱겁게 느껴져
위안이 되지 않는 그런 날.
혼자서 바삐 가다,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져 버린 날. 내 마음을 위한 처방전이 필요한 날이네요. 이런 날은 하던 거 딱 멈추고 가벼운 에코백 하나 둘러메고 집을 나섭니다.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귀에는 에어팟을 꽂고 가벼운 산책 겸 선택한 행선지는 우리 동네 기적의 도서관. 오후 2시, 도서관 창가 자리가 딱 햇빛 맛집이 될 시간이네요. 걷다 보니 발걸음 따라 마음도 조금씩 리듬을 탑니다. "그래, 나오길 잘했어!" 슬쩍 고개를 든 긍정의 기운이 사라지기 전에 신중하게 음악을 선택합니다. 도서관 가는 길 첫 번째 선곡은 윤상 4집 수록곡인 <소월에게 묻기를>. 평소 같으면 망설임 없이 베이스 손태진과 테너 김승직이 '오페라 카니발' 무대에서 부른 버전을 택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정훈희 선생님의 목소리로 먼저 듣고 싶습니다.
정훈희 선생님 version
https://youtu.be/kFlCP9dMSyU?si=AG3DIcDKIVUGFkOd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위스키를 닮았습니다. 연한 주홍빛의 연약함과 짙은 스모키향의 여운을 가진 쓸쓸한 목소리. 청아하면서도 탁한 그녀의 음성으로 듣는 소월의 "진달래 꽃"을 오마주한 이 곡은 진달래 피는 봄보다는 낙엽 지고 찬 바람 부는 차가운 이 계절에 더 잘 어울립니다.
베이스 손태진 & 테너 김승직 version
https://youtu.be/lGixUiLXOXg?si=gZKWIgO4i80NYkmS
2020년, 코로나로 인해 좋아하는 공연을 보러 다닐 수 없던 덕후의 암흑기. 그때 한줄기 빛처럼 찾아와 준 공연이 바로 여름의 한복판 예술의 전당에서 올려진 <오페라 카니발> 무대였습니다. 2월, 같은 공연장에서 봤던 발렌타인 콘서트를 끝으로 5개월의 공연 공백을 깨고 마주한 무대에서 제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곡이 바로 이 곡이었죠. 나의 최애 베이스( 손태진, 이하 '솜'으로 호칭 )가 블랙 턱시도에 나비 넥타이 매고 불러주는 소월이라니..... 하루에 10번, 20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서정적 고급미. 추천합니다.
역시 우울하고 꿀꿀할 땐 최애 앞으로. 요즘 브런치 덕질에 빠져 잠시 희석됐던 덕심이 살아나면서 움츠려 말려들어갔던 어깨가 어느새 곧게 펴져있네요. 자, 서둘러 다음 약을 처방할 시간입니다. 소월에게 물었으니 소월로 답해야죠. 김소월 시인의 <못 잊어>를 소환할 시간입니다.
소프라노 이해원 version
https://youtu.be/2jJBn13LUwo?si=qXb3QzHu4DV7Bdb7
언젠가 제가 성악을 배운다면 그건 분명 이 곡을 부르기 위해서일 겁니다. 어느 밤엔가 솜이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도입부만 짧게 불러준 걸 듣고 첫 귀에 홀딱 반해버린 곡이거든요. "못 잊어, 못 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라는 가사처럼 두고두고 이 곡이 생각나 한동안 여러 성악가들이 부른 버전을 찾아 듣다가 이해원 소프라노님 버전에 정착했습니다. 아니, 정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분한 복숭아 향이 감도는 그녀의 편안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읊어주는 소월의 시는 먹먹하고, 처연하고, 아련해서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아름답습니다. ( 파워 F는 매번 들을 때마다 전주와 도입부에서 이미 눈물 장전 완료 )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오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시큰거리는 콧등을 지그시 누르며 도서관 문을 엽니다. 반나절 동안 책과 사람의 온기로 알맞게 덥혀진 도서관에 들어오니 뜨거운 물에 담근 티백처럼 마음이 풀립니다. 풀어진 마음 덕에 꽉 막혀있던 나의 생각들도 어쩌면 진하게 우러나올 수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문득 달팽이관을 지나 내 맘을 가득 채운 소월의 시가 기억의 찻잔을 흔듭니다.
"맞다! 소월의 시에 대해 다룬 음악 책이 있었는데."
기억의 책장을 뜨문뜨문 넘겨보지만 도무지 찾아지지 않는 책갈피. 무작정 600번대 '예술' 서가로 찾아가 음악 코너를 훑어보지만 기억 속 제목은 나타나주질 않네요. 흐려져가는 기억력을 원망하며 무심코 던진 시선 끝에 보라색 책 등 하나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 비닐처럼 반짝 빛나며 걸립니다.
<노래의 언어>_유행가에서 길어 올린 우리말의 인문학
/ 한성우/ 어크로스
낯익은 제목에 마음 설레며 책을 꺼내듭니다. "노래가 사랑한 말들, 우리가 기억하는 말들. 한 세기에 걸친 유행가 속에서 우리의 삶과 사랑, 시대의 단편들을 불러내다." 뒷표지에 적힌 소개글을 읽고 책을 펼쳐 몇 장 넘기지 않아 매직아이처럼 떠오르는 문장, "김소월의 시가 노래로 많이 불린 이유는?" 찾았다, 내 소월! 찾았다, 내 글감!
책에는 노래가 된 소월의 시가 일곱 편이나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노랫말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 즉, 말은 말이되 '부를 수 있는 말'이 소월의 시에는 가득 담겨 있나 봅니다. 일곱 편의 시 중 가장 먼저 노래가 된 시는 <개여울>입니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이 노래의 멜로디를 모르더라도 시를 낭송해 보면 누구든 느낄 것입니다. 소월의 시 <개여울>에는 리듬과 멜로디가 이미 얹어져 있다는 걸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내용도 그의 시가 노래가 되는데 한몫합니다. 소월의 또 다른 시 <부모>의 가사를 살펴볼까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 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이 시를 읽고 이것이 부모님에 대해 쓴 시라는 것을 이해 못 할 이가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부모로부터 세상에 나왔으니 이 노래가 와닿지 않는 이 또한 없을 것입니다. 저자는 "복잡하고 난해한 시도 멋진 시로 인정을 받지만, 노랫말이 된 시는 더 널리 알려져 사랑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규칙적이고도 적당한 길이, 쉽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시“가 바로 그런 시들이라는 것이죠.
책을 빌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습니다. 요 며칠 글 쓰기가 너무 어렵고 힘들게 느껴졌던 건 아마도 나의 욕심 때문이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이 읽어줄 멋지고 완성도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 조회수를 올려줄 '신박한 제목'을 짓고야 말겠다는 욕심. 나만 즐겁고, 나만 관심 있고, 나만 좋아하는 글 말고 누구나 두루두루 좋아하고 공감할 만한 글을 써내야 한다는 욕심. <매일 쓰기> 도전에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힘찬 다짐 뒤로 슬쩍 감춰둔 부담감까지. 그 많은 욕심들이 제 마음 위로 돌산을 쌓고, 쌓아 작은 생각의 티백 하나도 우려내지 못하도록 글감의 우물을 말려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부담감은 내려놓고 본연의 나를 찾아갈 시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할 때 가장 신나고, 내가 흥이 나면 며칠 밤을 새우고도 끄떡없는 자기 주도적 기분파! 부담감에 파묻혀 뒤로 물러나 있던 나의 본캐를 불러낼 시간입니다.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와 우연히 글감 찾은 오늘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났네요! 맙소사, 이제 곧 제 마감 시간, 11시 59분이 다가옵니다. 서둘지 않습니다. 심호흡합니다. 아무도 너에게 매일 쓰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좋아서, 네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입니다."
맘의 준비 됐으니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요? 저는 새롭게 시작한 브런치 덕질이 너무 신나고 재밌으니까요!
다시 한번, 요이 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