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왔던 것들을 하면서 안 했던 것들을 할 겁니다.
'스토브리그', 드라마가 한창 방영되고 있었던 때에 소개팅을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나누는 스몰토크 중 상대 분이 그 드라마 너무 재밌다고 꼭 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땐 "아, 그 야구 드라마요? 저 야구는 별로 안 좋아해서..." 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아니! 야구를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고, 무조건 봐야 한다고 했던 그 말을 멋쩍게 웃으며 넘겼다. 되게 차분하고 조용한 분이신데 드라마 얘기에 이렇게 흥분하시다니, 뭐 야구랑 거기 나오는 배우들을 엄청 좋아하시나 보네 생각하면서. 그 당시의 내가 원망스럽다. 그 얘기를 흘려듣지 않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소개팅 상대와 메시지를 나누는 대신 스토브리그를 봤어야 했는데, 어쩌면 내 인생이 조금은 변했을 수도 있는데.
바야흐로 2년이 지나서야, 배우 박은빈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다가 스토브리그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 그때 그분이 엄청 추천했었지. 드라마 썸네일을 다시 봐도 그다지 내 취향의 드라마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 드라마라, 부산 살며 사직동의 야구 직관을 몇 번을 따라갔었는데도 복잡해 보이는 규칙도, 떠들썩한 분위기도 익숙해지지 않아 내 스타일은 아니라고 선을 그은 바 있기 때문이다. 야구가 가지는 특유의 팬쉽도 나의 공감대 밖이었으니까. 드라마는 로맨스 코미디, 스릴러 등 다양한 주제를 좋아하긴 하지만 요즘에는 사람 냄새 가득한 휴머니즘 드라마를 특히 좋아했다. 최근에는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를 재밌게 봤더랬다. 그래도 박은빈 배우의 매력이 최대화되었던 작품이라고 하니, 기대를 안고 심심했던 금요일 저녁에 한 편, 한편 보기 시작했다. 역시 드라마는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 내내 몰아봐야 제맛이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인간미 없는 백승수의 등장부터, 이세영 팀장의 당돌하고 가슴 뜨거운 애팀심(?)까지. 생생하고 입체적인 캐릭터와 시원시원한 대사에 빠져들어, 심지어는 인물을 분석하고 인상 깊은 대사들은 메모하면서 봤다. 이런 웰메이드 드라마를 단순하게 스포츠 드라마로 오해하고 2년이 지나서야 보게 되다니,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냥 즐기고 끝내는 킬링타임 드라마가 아니라, 내 삶에 적용하고 싶은 인사이트가 가득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특히 백승수가 꼴찌팀을 뿌리부터 흔들며 회생시키는 모든 전략과 리더십, 추진력에 잔뜩 흥분되었는데, 그 긴장감과 통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해왔던 것들을 하면서 안 했던 것들을 할 겁니다.
나는 스타트업을 다니고 있다. 그리고 회사는 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다. 서비스가 시작된 지 3년 차가 되니 그동안 멋모르고 관성적으로 해왔던 많은 것들에서 문제가 드러나고, 이제는 정말 큰 변화를 주도하지 않으면 미래가 불투명해질 수도 있는 시점이 다가왔다. 그런 때에 스토브리그를 만난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2년 전에는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맥락을 지금의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드라마 속 위기에 처한 야구팀 드림즈의 상황이 지금의 회사 상황에 부합할 수 있는 점이 많아 보였고, 나는 백승수 같은 능력과 경험은 없지만 백승수가 되고 싶었기에. 그의 분신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며 그의 대사와 행동에 깊게 몰입되었다.
꼴찌가 우승을 노린다는 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그랬듯,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웃음을 살 일이다. 그렇기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만, 한 편으로는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문제를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백승수 같은 '게임 체인저'가 필요한 것이다. 그는 단장 인터뷰에서부터 드림즈의 약점을 파악하고 체질 개선을 하기까지 압도적인 정보력과 뾰족한 분석력을 기반으로 한 문제 진단한다. 곧바로 변화에 대한 단호하고 과감한 추진력을 보였다. 아무도 야구를 가르쳐주지 않으니 책으로 배운다. 핸드볼, 씨름팀을 우승시킨 경험으로, 분야는 다르지만 최고가 되기 위한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각자 가진 무기 가지고 싸우는 건데
핑계대기 시작하면 똑같은 상황에서 또 집니다.
소 한번 잃었는데 왜 안 고칩니까? 그거 안 고치는 놈은 다시는 소 못 키웁니다.
전 사람을 바꾼 게 아니라 시스템을 바꾼 겁니다.
백승수의 리더십과 전략의 많은 부분이 인상 깊었는데 그중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어 더 큰 성장을 이끌어 내는 부분이 참 좋았다. 연봉협상 중 자신을 모욕한 선수, 트레이드에 불만을 가진 선수의 폭력과 도를 넘은 언행에도 그는 용서한다. 그들이 충분히 생각하고 스스로 반성했을 어느 적절한 타이밍에. 단순히 악과 선, 이분법으로 구분하지 않는 서브 캐릭터 구성이 참 좋았다. 뒤통수를 치고 실수를 거듭하는 인물에게 성장의 기회를 주어 매력적인 캐릭터로 풀어낸다. 사람이 어떻게 드라마에 나오는 것 마냥 한결같이 착할 수 있겠나, 이런 입체감이 다른 드라마와 차별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실수와 성장을 반복하는, 휴머니즘보다 더 휴머니즘 같은 드라마.
아무리 좋은 드라마라도 모든 에피소드가 높은 완성도를 가지는 것은 어렵다. 애정을 가지며 열심히 본방송을 시청했던 많은 드라마가 그랬다. 말미로 갈수록 스토리의 논리 구조가 애매해지고, 캐릭터의 일관성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역시 드라마 작가도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하지만 스토브리그는 1화부터 마지막화까지 단 한 회도 놓치지 않고 탄탄한 긴장감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각각 에피소드에 선수 계약, 운영 전략, 연봉 협상까지. '스토브리그' 시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순차적으로 다루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사건들이 꼭 스포츠팀이 아니라, 직장인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소재들이었다.
**스토브리그: 프로야구의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비시즌 기간. 겨울에 스토브(난로)를 둘러싸고 팬들이 응원 팀의 선수 계약, 다음 시즌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데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휴머니즘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앞서 언급했는데, 이상하게 인생 드라마로 손꼽히는 건 휴머니즘을 넘어 내 안에 야망을 건드는 승부욕을 자극하는 짜릿한 드라마다. 넷플릭스의 퀸즈 갬빗이 그랬고 뒤늦게 본 이번 스토브리그가 그렇다. 게으름을 이겨내고 스토브리그와 백승수 단장을 글로 정리해둘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종종 그에게 빙의되고 싶을 때 꺼내어 보아야겠다.